그런 말을 아빠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부모란 무엇인가

by 윤소희

그런 말을 아빠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항상 건강 조심하고. 그래도 해볼 건 다 해 봐.


몇 달 만에 전화한 딸에게 아빠가 해준 말이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80이 다 되어 가는 아빠가 맘껏 저질러 보라고 격려해 주는데, 아직 50도 안 된 딸은 세상 다 산 것처럼 한숨만 쉬고 있었으니. 일 저지르는 데 선수였던 내가 뭘 하려고 생각만 해도 다 무섭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요즘 난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매일 '어떻게 하지?'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울증 환자가 실은 세상을 가장 정확히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저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장밋빛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좀 과장하면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이고.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조언만 듣다 보면, 우울증 환자처럼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자기 효능감이 바닥난다.


내게 필요한 것도 객관적인 사실이나 지적질이 아니었다. 내 부족함이나 무능함에 대해서는 이미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조금 허황된 격려가 필요했다. '넌 할 수 있어' '한 번 해 봐' '그거 재밌겠는데' 같은 말들. 금가루를 듬뿍 뿌리고 장밋빛 안경을 씌워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말을 아빠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동안 건강한 줄만 알았던 아빠가 넉 달 전쯤 걸음을 못 걷고 주저앉았다. 일부 혈관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급히 수술을 했고, 회복 중이다. 그 사실을 듣고 잠깐 울먹이며 전화 통화를 했지만, 그 후로는 잊고 살았다. 아빠 곁에는 돌봐줄 누군가가 있으니 괜찮겠지. 작년 여름에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해 있는 시어머니께는 매일 전화를 드리면서도, 아빠는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부모를 대하는 내 태도와 들이는 정성에는 분명 차별이 있었다.


그런 딸에게 분명 섭섭했을 텐데. 어버이날이라고 불쑥 전화한 딸에게 아빠는 그 딸이 요즘 가장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말을 해준 것이다.

인생 한 번뿐인데, 하고 싶은 건 다 해 봐.


아인슈타인이 어릴 적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아 지진아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학교 선생조차 '무엇을 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낙인찍었다. 그런 아인슈타인에게 "너는 특별한 장점이 있단다" "세상에는 너만 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어"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해준 건 그의 어머니였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자녀에게 부모가 줄 수 있는 건 그 아이에 대한 깊은 믿음을 담은 한 마디일 것이다. 당장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아이 안에 존재할 그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한 마디. 그 한 마디는 작지만 펌프에 붓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처럼 깊은 샘에서 물을 콸콸 길어낼 수 있고, 불을 댕기는 부싯돌처럼 마른 장작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다.


자녀인 나는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부모에게 섭섭하게 대하기도 한다. 심지어 부모를 차별한다. 부모인 나는 아이가 속을 썩이거나 내게 소홀히 대할 때도 동일하게 믿음과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믿음의 한 마디를 제때 건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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