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를 공유하는 일
아프지 말자, 소희야.
그 멀리서 내가 아픈 걸 어떻게 알았을까. 깜짝 놀라 밤 사이 도착한 카톡 메시지를 열었다. 사진 가득 담긴 푸릇한 감나무 잎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툴루즈에 사는 친구가 감나무 사진을 보내준 것이다. 여섯 시간의 시차를 두고 감나무를 공유하고 있는 친구는 좀 더 일찍 사진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갓 핀 꽃을 찍어 보내려고 했었는데.
그제야 푸른 잎 사이사이에 피어 있는 감꽃이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꽃인 줄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감나무를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그동안 감꽃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잎겨드랑이에 작은 종처럼 연노란색 꽃들이 달려 있다. 개나리 꽃잎처럼 뾰족한 꽃잎들이 나팔 불듯 한껏 밖으로 뻗은 모습이 귀엽다. 샛노란 개나리 꽃이 대여섯 살 아이 같다면 수줍은 듯 연한 빛을 띠는 감꽃은 열두세 살쯤 된 소녀 같달까. 여전히 앳되지만 아기 티는 벗은 감꽃을 보니, 갓 피었을 때 꽃잎을 오므린 모습이 좀 더 앙증맞았을 거라 짐작되었다. 친구가 빨리 사진을 보내지 못해 아쉬워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꽃 사진을 빨리 보내지 못했던 건 툴루즈에 며칠째 비가 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친구가 며칠 동안 오른쪽 팔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날개뼈 안쪽 근육 통증 때문에 꼼짝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보통 담 걸린다고 표현하는 근막통증증후군인 모양이었다. 마침 요 며칠 나도 뒤늦게 코로나에 걸려 앓고 있던 참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는 함께 아팠던 것이다. 시차와 거리를 두고 감나무를 공유하는 것처럼 아픔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프랑스와 중국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확 좁혀주었다.
내 마음을 읽고 자기 집 앞마당의 감나무를 선물한 친구. 친구는 감나무를 물리적으로 내게 전해줄 수는 없었지만, 감나무를 매개로 나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느슨한 연결이 아픈 나와 친구를 제때에 일으켜 주었다. 감나무 사진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다정한 한 마디를 주고받는다. 감나무가 아니었다면, 아주 가까이 살았어도 서로 모르고 지나쳤을 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갓 피어난 감꽃도 앙증맞고 예뻤겠지만, 한껏 밖으로 뻗어 휘어진 꽃잎의 곡선도 아름답다. 꽃잎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푸른 감 열매가 맺히면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주홍빛으로 익은 감도, 또 감이 떨어진 후에 남은 앙상한 가지조차 나름의 아름다움이 분명 있을 것이다.
친구와 내가 천천히 한 번 가는 인생길, 감나무가 사계절을 반복하며 친절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때마다 그때만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지나간 시절을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다고 말을 건네며.
(감나무를 공유하게 된 사연은...)
https://brunch.co.kr/@yoonsohee0316/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