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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흔 Feb 12. 2024

오리가 좋아? 닭이 좋아?

엄마와의 데이트


"엄마, 오리가 더 좋아? 닭이 더 좋아?"


"글쎄. 엄마는 다 좋아 보이니까 소흔이가 원하는 거로 골라봐 봐."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한없이 사랑을 주고 자상한 미디어 속 엄마가 아닌 규칙과 규정을 중요시하고 화를 내실 때 무척이나 무서운, 흔히 말해 기가 강하신 분이었다.



항상 오빠를 예뻐하셨던 엄마. 항상 사랑을 더 달라며 떼를 쓰는 오빠 때문에 나는 항상 순위에서 밀렸다. 게다가 순서를 중요시하는 엄마는 항상 오빠가 먼저, 그리고 그다음이 나였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그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럽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아빠가 나를 예뻐해 주신 것도 있었기 때문에 그저 조금만 더 엄마가 나를 봐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었다.



그런 엄마와 어느 날 단 둘이 여행을 가게 되었다. 전후 사정이야 어렸던 나는 알지도 못했지만 사진처럼 남은 기억 속에 엄마와 내가 둘이서만 다녔던, 그것도 당일치기 여행이 아닌 1박 2일로 계획된 여행이었다.



무려 1박 2일 동안 엄마가 내 거라니! 엄마가 오빠의 방해 없이 오롯하게 나만 바라봐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손을 잡고 걷고, 나랑 놀아준다니! 훼방꾼 없는 엄마랑 단 둘이서만 떠나는 여행이라니! 매일 오빠에게 치였던, 고작 6살짜리 아이에게 그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환상적인 일이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라.




여행의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였다.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는데 사실 그 과정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속초에서 열린 엑스포를 보러 갔던 기억만은 생생했다.



그때의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청 큰 조각상을 구경하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의 시선은 항상 내게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즐겁고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많이 사주셨다. 애당초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가 아니었지만, 엄마와의 단둘이 하는 데이트에, 유원지에서 사는 간식과 기념품은 6살 배기 꼬마에게는 즐거움 그 자체인 일이었으니까.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던 엄마는 내게 이것저것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을 손에 쥐어주셨다.



작디작은 고사리같은 손에 한가득 풍선과 풍선 망치, 그리고 각종 기념품들이 쥐어졌다. 그때의 기분을 회상해 보면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랬던 나는 한껏 기분을 뽐내며 엄마가 서보라는 곳에 서서 사진 포즈를 취했고, 그렇게 엄마와의 시간을 즐겼다.




그렇게 구경을 하다가 관심을 가지게 된 기념품은 바로 작은 상자였다. 정확히는 상자 위에 동물 스티커가 붙어있었었고, 상자를 열면 스티커에 그려진 동물 모형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센서에 의해 빛이 들어가면 동물의 울음소리가 나는, 단순한 장난감이었다.



그게 어쩜 그렇게나 갖고 싶었는지.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앉아 상자에 들은 동물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고, 엄마는 내 옆에 서서 함께 구경하셨다. 동물은 이래서 싫고, 동물은 저래서 싫고, 신중하게 골라낸 최종 상자는 두 개였다. 오리와 닭. 두 개는 너무 비슷하기도 하고 울음소리도 귀여웠어서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복잡한 장소 속에서 작은 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고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울음소리와 동물 모형의 완성도, 동물 모형의 개수와 심지어는 빛이 들어올 때 얼마 만에 소리가 나는지까지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기다려줄 수 있겠는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사람이 붐비는 시끄럽고 복잡한 장소고, 겉보기에 그게 그거 같을 테니까. (6살짜리가 생각해서 걱정하기에는 우스워보였겠지만) 어린 나 또한 엄마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짐작했고, 괜히 엄마와의 데이트에 방해가 되는 행동일까 싶어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어떤 게 나아?"



그 물음은 즉, 복잡한 곳에서 더 힘들게 서 있지 말고 엄마가 골라주면, 그것을 사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엄마는 둘 다 괜찮아 보여. 그러니까 소흔이가 진짜 원하는 걸로 골라보자."



엄마는 그 말을 끝으로 내가 깊이 있게 고민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다. 정말 내가 하나하나 비교하고 따져볼 때까지. 그렇게 비교해서 구매한 것에 후회가 남지 않을 수 있도록. 그렇게 나는 깊고 긴 고민 끝에 닭을 골랐고, 그렇게 예쁜 상자를 두 손에 꼭 쥔 채 환하게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어른들의 시간보다도 훨씬 더 느리게 흐른다. 그 오랜 기억 속의 나는 굉장히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했고, 온 세포가 집중하여 두 상자 중에 더 마음에 드는 상자를 골라냈다. 그리고 그동안 엄마는 그 어떤 재촉도 압박도 없이 내 선택을 기다리고 존중해 주셨다.



그때의 나는 확실히 엄마께 감동을 받았고, 그렇게 이 여행이 오래도록 각인되었다. 엄마께서도 확실히 그 후로는 나는 엄마에게 장난도 많이 치고 대화도 잘 나누는 편안한 모녀관계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여행을 다녀오기를 잘한 것 같으시다고, 그렇게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였을까?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글을 정리하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아, 아이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아이가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도전하려고 할 때,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부모가 해야 하는 역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묵묵히 기다리고 응원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큰 힘과 지지가 된다. 그 지지를 받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자신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나아가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단단히 받쳐주는 거대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이제는 그것을 아는 게 아니라 느낀다. 온몸으로 그때의 사랑과 기다림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가 느껴진다.



언젠가의 나도 이 기억을 거울삼아  아이가 깊이 고민할 때 여유롭게 충분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날의 엄마가 말없이 기다려주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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