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시란 곧 윤동주이다. 초등학교 때 언니가 들고 있던 시집에서 윤동주를 처음 만났다. 처음 ‘서시’를 읽던 날!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마디마디가 오롯이 내 가슴에 와서 박혔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이 있을 수가 있구나!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가 않고 되새길수록 의미가 한층 더해졌다. 그리하여 ‘서시’를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인생의 좌우명은 윤동주의 ‘서시’이다. 그러나 ‘서시’처럼 살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고 쉬운 길로 가려고 하는 욕망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들끓는다. 죽는 순간에 ‘서시’를 읊는다면 나는 무슨 생각이 들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수 있을까? 종종 너무 어려운 좌우명을 선택했다는 생각도 든다. 패기 넘치던 10대 시절 정한 좌우명을 쉽사리 변경할 수는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다이어리나 수학의 정석 맨 앞 페이지에 시를 필사해서 틈틈이 읽곤 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인생의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다. 나라는 인간은 시도 즐긴다라는 허세도 약간 있었다. 물론 다른 시도 읽고 감동도 받았지만 윤동주만큼 큰 울림을 주진 못했다.
윤동주 사진을 보고 엄청 잘생겨서 더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믿기지 않지만 윤동주가 내 이상형인 시절이 있었다. 가끔 윤동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목소리는 어떠했는지... 첫사랑은 누구였는지도 말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시를 남긴 것일까? 윤동주 자체에 대해서 궁금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의 학창 시절에 시는 거의 독립운동으로 연결 지어 풀이를 하곤 했다. 그러나 윤동주 시가 혹시 연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렇게 순수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에게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연서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시를 읽어보기도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는 한 청년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에 과도한 의미와 상징을 두는 것은 아닌지. 물론 이것이 우리가 윤동주 시를 좋아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윤동주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 인간 윤동주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시를 좋아하니 사람까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 진다.
영화 ‘동주’가 개봉했을 때 영화관에서 눈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울었다. 그의 짧은 삶이 아쉽고 그 시대가 처참하고 이 모든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만약 윤동주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역사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라는 인간은 독립운동을 할 만큼 강한 심장을 가졌는가? 조국, 독립이라는 대명제 앞에 단지 고문이 무서운 한낱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지... 이런 내가 ‘서시’를 좋아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단지 멋있어 보인다는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현재 시대의 대명제 앞에서는 나는 과연 당당한가? 먹고사는 것이 제일 중하다는 전제 아래 적당히 눈감고 적당히 동조하는 것이 지금의 나이다. 요즘 ‘서시’를 읽으면 그렇게까지 빡빡할 것은 없잖아? 융통성이 있어야지. 이런 생각도 한다. 학창 시절의 순수함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해져 온다.
나의 윤동주에 대한 애정을 아직까지도 계속된다. 윤동주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그의 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참 궁금하다. 청년기 시절 암울한 시기에 쓴 그의 시와는 또 다른 모습을 지니지 않을까? 아름다운 청년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살다 간 그의 역사를 시가 남아 대신 전해주고 있다. 윤동주의 시를 읽고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고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서도 시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시에는 힘이 있다. 짧은 말속에 응집된 시인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 정신을 우리가 읽고 가슴에 새긴다. 나에게 있어 그런 시인이 윤동주이고 서시이다. 늘 내 곁에 같이 있었고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시는 그렇게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함께 한다. 오늘 밤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윤동주의 시를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