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뜨거운 김호중, 강형욱 논란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민주주의가 확립된 아테네에서 이기적인 인물을 처리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덜 잔인한 방법이 고안된 방법이 나온다.
바로 ‘오스트라키스모스’라는 제도였다.
오로지 자신의 야망만을 불태우거나 정치적 음모를 꾀하는 자를 다루는 문제였다.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분열과 불안의 씨앗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매년 10년 동안 추방하고 싶은 이름을 적어서 6천 표 이상 받으면 즉시 도시에서 추방하는 제도였다.
6천 표를 넘지 않으면 가장 많은 표를 가진 자가 추방되었다.
불안을 조장하고 눈에 거슬리는 인물, 민중에게 봉사하지 않고
그들을 밟고 올라설 기미가 있는 인물을 쫓아냈다.
이러한 투표를 할 때 일종의 축제 같았다고 한다.
요즘 시대도 이 법칙은 적용되는 것 같다.
투표를 하지 않지만 높이 올라가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의 각종 비리나 비하인들 이야기가 폭로된다.
사실상 퇴출과 같은 아테네 시대의 추방과 결과적으로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나는 신성하고 경건하므로 너희도 내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암암리에 강요하는 태도,
공공의 선을 무시한 거만한 야망, 우월함에 대한 과시, 조용하고 은밀하게 책략을 도모하는 것,
구제 불능의 추악한 행태 같은 것은 요즘 시대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우리 사회에서 용납하는 수준의 어떤 선의 정도 정해져 있는 듯하다.
법으로도 정해져 있지만 또한 엄격한 윤리적 잣대가 존재한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그리고 혼자 고고한 척하는 인간을 우리는 그대로 두지 않는다.
힘껏 올리는 것도 인간이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오스트라키스모스#추방#퇴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