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가져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지만 부모의 유산으로 간병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여주인공. 야한 소설을 쓰고 SNS에 배설하듯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적어 간다. 임신하고 싶다. 그리고 중절 수술을 하고 싶다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성적 욕망에 대해 가감 없이 적는다.
장애인에 대한 성은 영화 ‘오아시스’에서 다뤄졌었다. 헌치백을 쓴 작가 역시 ‘오아시스’ 영화를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그간 성은 아름다운 성인남녀를 주인공으로 다뤄졌다. 그리하여 장애인이나 노인에 대한 성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성적 대상화조차 되지 못하여 섹스에 참여할 가망성이 없는 장애 여성의 성에 대한 갈망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무관심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로 상을 받고서야 궁금하여 이 소설은 읽은 작가의 아버지는 집안 망신을 줬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여주인공은 남자 간병인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 남자 간병인은 관계를 하면서 그 여주인공을 경멸한다.
성관계를 하는 도중이 거의 죽을 뻔한 여주인공에게
“죽을 뻔하면서까지 할 일입니까?”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도 그런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그렇게 하고 싶었냐고 말이다. 우린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욕망을 별거 아니라는 서로 말하곤 한다. 별거 아니라고 말이다. 그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을 갈망하는 것은 사람 스스로 자유의지이다. 누구에게 그것을 탐하지 마라. 갈망하지 마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병인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하는데 남자의 성기가 발기된다. 여자 주인공은 남자가 거기에 굴욕을 느꼈을지 생각했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한 남자가 대학 때 자기 과에서 별로 예쁘지 않은 여자와 잤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그 남자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소문은 그렇게 났다고 한다. 남자애들이 그 남자에게 아무리 성욕이 지배했어도 어떻게 그 여자랑 잘 수 있냐며 자신을 동물 취급했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자신을 좋아했던 그 여자가 그런 소문을 낸 것이었다고 한다.
그때 서야 난 남자들이 예쁘지 않은 여자와 잠자리하는 것을 성욕에 지배당한 것으로 비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소개팅 가기 전에 남자가 자위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보다 이성적 판단을 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듣고 그럴 수도 있나 보다 했다.
장애 여성은 성적 대상조차 될 수 없음에 더욱 좌절하고 더한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사실 영화 ‘오아시스’에서도 사회적으로 도태남이 그 여성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남자 간병인은 거의 정상적인 연애가 어려운 도태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