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거리가 주는 고요한 평안에 대하여

by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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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보이지 말아야 할 돋보기가 장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남들은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조각들이, 내 시야에는 거대한 바위처럼 굴러들어 와 박힙니다. 누군가의 밥 먹는 소리, 미묘하게 거슬리는 옷차림, 특이한 걸음걸이, 혹은 무심코 내뱉는 말끝의 억양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한 번 눈에 밟히기 시작하면 그것은 마치 신발 속의 모래알처럼 온종일 신경을 갉아먹습니다."그러지 말아야지, 그럴 수도 있지."


수없이 되뇌어 봅니다. 타인은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형이 아니며,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리를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의 이해가 가슴의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 사소한 거슬림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어 혼자만의 지옥을 짓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나를 발견할 때면 참으로 막막해집니다.


이런 나 자신이 한심하고 밉습니다. 고작 이런 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내가 싫습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든 '쌍년'일 수 있고, 이해받지 못할 타인일 텐데 말입니다.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내 모습이라니. "좀 더 너그러워지자, 둥글게 살자"라고 스스로를 타일러 보지만, 문득문득 스치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불쑥 튀어나오는 본능처럼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예민함은 나의 천성이자, 어쩌면 형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이 예민한 감정의 파도로부터, 그리고 그 파도에 휩쓸려 타인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나로부터 서로를 지키는 방법을 찾기로 말입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정중한 거리두기'였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역설적으로 깊숙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본에 충실합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약속 시간은 칼같이 지킵니다. 나의 몫을 다하고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자 방어입니다. 사적인 질문은 되도록 삼갑니다. 호기심이라는 가면을 쓴 질문들이 때로는 실례가 되고, 때로는 낫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묻습니다. "그건 너무 삭막하지 않냐"라고. "인간미가 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친밀함이 과연 무례함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친하다'는 이유로 선을 넘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꽂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부부도, 피를 나눈 가족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삐걱거리는데, 하물며 살아온 배경이 전혀 다른 타인과의 관계는 오죽하겠습니까.


특히 직장처럼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가장 평화로운 방법은, 서로의 다름이 부딪히지 않도록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가운 외면이 아니라, 서로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가장 뜨거운 노력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제 관계에서 '기대'를 뺍니다.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니 실망할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줄어듭니다. 깊은 관계가 주는 기쁨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얕지만 안전한 관계가 주는 평온함을 선택했습니다. 혼자여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이기에 온전해지는 시간을 즐깁니다.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고요가 찾아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잘 지내는 완벽한 방법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정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쁘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미워하며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 미지근한 온도로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인간관계론입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데이지 않고, 너무 멀어져서 얼어붙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온기. 깍듯한 예의라는 갑옷을 입고, 존중이라는 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타인이라는 바다 위에서 나만의 작은 섬을 단단히 지키는 것. 비록 그것이 조금은 외로운 길일지라도, 나는 이 고요하고 잠잠한 상태가 좋습니다. 오늘도 나는 깍듯하게 인사하며, 적당한 거리에서 평화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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