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라는 낯선 여행,
그리고 엄마의 뒷모습

by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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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엄마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낯선 이방의 땅, 패키지여행이라는 짜여진 틀, 그리고 우리와 함께한 낯선 사람들. 여행의 설렘보다 엄마를 먼저 잠식한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행여나 당신의 느려진 걸음이 일행에게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가파른 길에서 숨이 차올라 뒤처지지는 않을까. 엄마는 떠나기 전부터 자신의 몸을 걱정하며 작아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엄마는 씩씩했습니다. 아니, 씩씩해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가이드가 건넨, 친절을 가장한 한 마디가 엄마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나 봅니다.


“어머니, 이번 여행 팀 중에 연세가 제일 많으신데… 힘들면 꼭 말씀하세요.”


그 말은 배려였을지 모르지만, 엄마에게는 ‘당신은 보호받아야 할 노인’이라는 확인 사살과도 같았습니다.


엄마는 가이드가 권하는 버스 맨 앞자리, 그 편안한 ‘노약자석’을 한사코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가이드 바로 뒤에 바짝 붙어 걸으셨습니다. “나 아직 괜찮아. 짐이 되지 않아.”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그 절박한 발걸음이, 뒤따르는 제 눈에는 왜 그리도 아프게 박히던지요.


자식에게조차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그 마음. 엄마를 바라보는 제 시선 끝에 어느새 왈칵 눈물이 고였습니다. 언제 엄마는 이렇게 작아지셨을까요. 그 꼿꼿하던 등은 굽어지고, 걸음걸이에서는 어릴 적 보았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문득 거울을 보듯, 엄마의 주름진 얼굴에서 저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염색을 하지 않아 하얗게 센 엄마의 머리카락은 세월의 백기(白旗)처럼 보였습니다. 저 또한 새치 염색으로 검은색을 덧칠하며 세월을 감추고 있지만, 언젠가 저 덮개를 걷어내면 저도 엄마처럼 하얀 눈을 맞은 듯한 모습이겠지요.


저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엄마에게 씌워드렸습니다. “엄마, 나이 들수록 칙칙한 색 말고 이렇게 밝고 화사한 걸 써야 해.” 그렇게라도 엄마의 시간에 환한 조명을 비추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모자챙 아래로 드러난 엄마의 깊은 주름을 보며, 뜬금없는 허무함이 밀려왔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렇게 늙고, 시들고, 사라질 텐데… 우리는 왜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한 뒤에도, 그 질문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엄마와 함께 오르내리던 지하철 계단은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습니다. 젊은 날엔 두 칸씩 뛰어오르던 그 계단이, 이제는 숨을 고르며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 난코스가 된 것입니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저는 그제야 세상이 노인과 약자에게 얼마나 불친절한 곳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 시위를 하던 사람들의 외침이,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규’였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사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의료 기술은 우리의 심장을 더 오래 뛰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곧 삶의 존엄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눈은 침침해지고, 귀는 희미해지며, 빠릿빠릿하던 육체는 점차 내 뜻을 거스르기 시작합니다. 점점 닫혀가는 감각들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요?


엄마의 필사적인 걸음걸이에서 저는 하나의 답을 찾습니다. 그것은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였습니다. 육체는 쇠락할지라도, 내 삶의 주도권만은 놓지 않겠다는 그 단단한 마음. 비록 그 걸음이 남들보다 느리고 위태로울지라도,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겠다는 그 태도야말로 우리가 늙음이라는 낯선 여행을 마주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언젠가 엄마의 나이가 되겠지요. 그때 저의 뒷모습은 어떨까요. 흐릿해지는 눈으로도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잘 들리지 않는 귀로도 타인의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그런 단단한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저 또한 늙음이라는 파도 앞에서 너무 쉽게 뒷걸음질 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모두 늙어갑니다. 하지만 그 쇠락의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 위에 밝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오늘도 한 걸음, 느리지만 정직하게 내딛는 엄마의 그 걸음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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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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