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늙어갑니다, 그런데 어디로?

나이듦에 대한 혐오, 그리고 존재의 의미

by 윤슬


짐이 된다는 공포


나이 듦에 대한 혐오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 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공경과 배려를 말하지만, 사회의 더 깊은 층위에는 전혀 다른 감정이 흐르는 듯합니다. 젊고 생산적이고 빠르게 적응하는 존재는 환영받고, 느리고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는 부담으로 취급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돈이 많고 건강하고 세련되면 “멋지게 늙었다”는 찬사를 받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순식간에 짐이 됩니다. 같은 노인인데도 누구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누구는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늙음 그 자체가 아니라, 쓸모없어 보이는 늙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잔인한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늙어가는데, 정작 사회는 늙음 자체를 실패처럼 취급합니다. 젊음은 가능성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노년은 비용의 이름으로 계산됩니다.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고령화, 연금 고갈, 재정 부담, 돌봄 위기 같은 단어가 쏟아집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국가 재정과 복지 체계는 분명 준비되어야 하고, 인구 구조 변화에 맞춘 제도 개편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언어가 너무 쉽게 사람을 숫자로 바꾸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말은 사실 통계의 언어인데, 그것을 매일 듣는 노인 개인에게는 ‘당신은 사회 문제입니다’라는 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굶어 죽지 않는데도 스스로 삶을 접습니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노인 자살의 원인을 경제적 빈곤으로만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돈의 문제는 매우 큽니다. 가난은 인간의 존엄을 서서히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습니다. 정말 가난만이 원인이라면, 더 가난했던 시절에 자살은 더 많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날의 노인은 단지 돈이 없어서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밀려났다는 감각 때문에 더 깊은 절망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 사회가 자신을 감당해야 할 비용으로만 본다는 느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미안해지는 감정 말입니다.


유서에 “짐이 되기 싫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 문장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한 메시지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이며, 당신을 돌보는 일은 부담이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그렇게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은 스스로를 지워야 한다는 쪽으로 밀려갑니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나약함이라기보다 사회적 상상력의 실패에 가깝습니다.


아이러니한 시대


더 아이러니한 것은 한편으로는 의료기술이 발달하여 인간은 점점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전 같으면 살지 못했을 병을 견디고, 더 오랜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 오래 사는 삶을 부담이라고 말합니다. 오래 살게 해 놓고 오래 사는 것을 걱정합니다.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은 찬양하면서, 연장된 생명을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두려워합니다. 이 모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더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되려면, 오래 살아도 괜찮은 사회여야 합니다. 단순히 생존 기간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관계와 역할이 함께 연장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긴 유예기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가 노인을 지나치게 단순한 존재로 그린다는 데 있습니다.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 돌봄의 대상, 혹은 정책적 부담. 물론 도움이 필요한 노인도 많지만, 그것이 노년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의 노인은 과거의 노인과도 다릅니다.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일할 수 있고 더 많이 배우고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는 여전히 노인을 하나의 낡은 이미지 안에 가둡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일할 수 있고, 누군가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누군가는 젊은 세대와 협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도와 문화는 그들을 ‘퇴장한 사람들’처럼 다룹니다. 나이만 들었다고 이미 끝난 사람처럼 보는 시선, 바로 그 시선이 사람을 먼저 늙게 만듭니다.


성공 프레임 밖의 사람들


사실 이런 문제는 노년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다른 세대의 자살 문제를 보아도 비슷한 구조가 보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 속도가 느린 사람, 잘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사회는 은근하고도 지속적인 압력을 가합니다. 너는 왜 아직도 거기에 있느냐고, 왜 더 빠르지 않으냐고, 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 질문을 오래 듣다 보면 사람은 자기 존재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성공이라는 프레임 밖에 있는 사람을 너무 쉽게 경멸하는 문화를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인을 향한 혐오도, 실패자를 향한 냉소도, 뒤처진 사람을 향한 조롱도 모두 같은 뿌리에서 자라나는 것 아닐까요. 쓸모가 없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AI 시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요즘 AI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감각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말, 인간보다 더 빨리 판단하고 더 정확하게 분석하고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 뉴스는 단순한 기술 소식이 아니라 존재론적 불안을 자극합니다. 대체 인간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기계가 더 잘하고 더 싸고 더 효율적이라면, 인간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특히 자신의 노동과 역할로 자존감을 유지해 온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매우 위협적으로 다가옵니다.


사람은 쓰임을 통해 존재가치를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감각, 내가 이 세상 어디엔가 보탬이 된다는 느낌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힘입니다. 그런데 고령화의 시대와 AI의 시대는 묘하게 같은 불안을 건드립니다. 너의 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너는 대체 가능하다, 너 없이도 시스템은 굴러간다. 이런 메시지가 반복되면 사람은 자신이 사라져도 되는 존재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의 불안이 단지 경제 문제나 기술 문제가 아니라, 존재 의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상


물론 답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한 번도 이런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도 없고, 이렇게 빠르게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시대를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모두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그래서 더 쉽게 서로를 탓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노인을 향해 분노하고, 어떤 사람은 청년을 향해 냉소하며, 어떤 사람은 기술을 향해 적개심을 품습니다. 불안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그것은 혐오로 바뀝니다. 그리고 혐오는 늘 가장 약한 곳으로 먼저 흐릅니다.


하지만 혐오는 결코 남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늙은 사람을 조롱하는 사람도 내일은 늙습니다. 오늘 뒤처진 사람을 비웃는 사람도 언젠가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대체 가능한 노동자를 한심하게 보는 사람도 언젠가는 AI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의심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던지는 무의미한 적대는 결국 언젠가 우리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빠르고 더 유능한 인간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느려져도 뒤처져도 병들어도 늙어도 여전히 살아 있을 이유를 서로에게 허락하는 문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는 늘 위기 앞에서 답을 찾아왔습니다. 산업화의 충격도, 전쟁의 폐허도, 기술 변화의 혼란도 완벽하게 준비된 채 통과한 적은 없습니다. 늘 흔들렸고, 갈등했고, 누군가는 반발했고, 또 누군가는 적응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술 거부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역할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갈지는 아직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면 효율성만으로 사회를 설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존재는 쓸모 이전에 있습니다


오래 산다는 것의 의미,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근거.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더 진지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정답은 아직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쓸모가 없으면 사라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은 생산성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날에도,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시기에도, 늙고 병들어 가는 시간 속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저는 답을 모릅니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생각합니다. 존재는 쓸모 이전에 있다는 것. 인간이 무언가를 생산하기 때문에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기 때문에 살아도 된다는 것. 그 감각을 사회가 제공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그 감각을 찾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는 ‘더 오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오래 살아도 미안하지 않은 사회’ 일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늙음은 부담이 아니라 한 인간이 통과해 온 시간의 무게가 되고, 느림은 낙오가 아니라 다른 리듬이 되며, 쓸모 없음의 순간조차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고령화도, AI도, 변화도 덜 두려워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늘 답을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아마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다만 그 답이 혐오가 아니라 존엄에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기술도, 더 효율적인 복지 시스템도 아닐지 모릅니다. 가장 단순한 것. 너는 여기 있어도 된다는 말 한마디. 속도가 느린 사람을, 방향을 잃은 사람을, 지쳐 주저앉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어떤 사회인지를 말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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