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왜 늘 축하의 얼굴로만 오지 않을까요?
식당에서 엿들은 한마디
우연히 식당에서 옆자리 대화를 듣게 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대를 나왔는데 1년이 넘도록 취업이 안 되고 있다고요. 그래서 이제는 눈을 좀 낮춰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서울대 나왔는데, 어떻게 눈을 낮추냐?"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은 덧붙였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요.
저는 그 짧은 대화가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오만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그 말 안에는 자존심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무너질 수 없는 어떤 세계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며 차곡차곡 쌓아온 기대, 칭찬, 주변의 시선, 그리고 스스로 품어온 미래의 크기. 그것들이 한꺼번에 그 짧은 문장 안에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학벌이 증명하는 것과 증명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학벌은 그 사람의 지난 시간을 증명해 준다고요. 적어도 학창 시절만큼은 성실했고, 치열했고, 주어진 경쟁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낸 사람이라는 뜻이라고요. 저는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좋은 학벌은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그 사람을 대신해 먼저 입을 열어주는 문장 같습니다. 채용 담당자 앞에서도, 낯선 조직 안에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검증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반대로, 학력란이 비어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 사람이 아무리 성실하고 똑똑하더라도, 세상은 그 빈칸을 쉽게 호의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검정고시를 봤든, 일찍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든, 다른 경로로 자신을 증명해 왔든, 그는 자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해냈는지,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누군가는 단 한 줄의 학벌로 증명하는 것을, 누군가는 몇 페이지에 걸쳐 납득시켜야 합니다.
그러니 서울대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좋은 카드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 카드가 너무 좋을 때 생깁니다. 가능성만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퇴로까지 막아버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열어야 할 문이 너무 많아져서, 오히려 어느 문도 들어서지 못하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높이 올라간 기대는 때로 발 디딜 땅을 잃게 합니다.
서울대를 나왔으면 가족의 기대도 클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클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거는 기대가 가장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많은 시간을 "나는 더 좋은 곳에 가야 한다"는 믿음과 함께 살아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믿음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입시를 통과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에게 "눈을 낮추라"는 말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단순히 지원 회사를 바꾸라는 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평생 붙들고 온 자기 서사를 수정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나는 성실했고, 잘했고, 인정받아왔고, 그래서 앞으로도 그에 맞는 삶을 살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어느 날 세상이 "이제는 그 정도면 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이 느끼는 좌절은 취업이 안 돼서 힘든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어온 자기 가치의 체계가 흔들리는 고통까지 함께 옵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기업만 고집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허영이라고 부르겠지만, 저는 허영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 중에는 분명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 테니까요. 더 좋은 환경, 더 큰 연봉, 더 높은 사회적 인정. 그것을 바란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누구나 자기 노력의 결과가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보상받기를 바라니까요.
하지만 기대가 너무 높아지면, 사람은 어느 순간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만 바라보다가, 결국 어디에도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버리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버텨주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존심은 사람을 지켜주는 벽이 아니라 사람을 가두는 방이 되기도 합니다.
"왜 여기 오셨어요"라는 말이 칭찬만은 아닙니다.
예전에 한 공무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9급 공무원인데 고려대를 나왔다고, 입사 후에 "왜 9급 시험을 쳤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얼핏 들으면 아까운 인재를 향한 감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편한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안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뒷말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데 갈 수 있었을 텐데."
"여긴 당신이 있을 곳은 아닌데."
"혹시 어쩌다 밀려서 온 건 아닌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자리를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학벌이 너무 좋으면, 때로는 현재의 자리에서조차 현재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늘 과거의 성적표와 비교되고, 늘 더 높아야 할 사람으로 남습니다. 지금 이 일을 선택한 사람으로 보이기보다, 어쩌다 이곳까지 밀려온 사람처럼 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 출신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직업을 택할 때, 그는 일종의 이중 부담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취업 문턱을 넘은 뒤에도 "왜 여기 왔냐"는 질문을 받고, 그 질문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계속 해명해야 할 수 있으니까요. 취업이 안 돼서 왔다고 솔직히 말해도,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서울대인데"라는 말이 늘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학벌은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선명한 꼬리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 이름이 사람을 소개하는 대신 사람을 가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숨 막히는 사람은 정작 그 이름을 가진 당사자입니다.
인생은 시험이 아닌데,
우리는 자꾸 점수처럼 살아갑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시험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웠습니다. 잘하면 올라가고, 못하면 내려가고, 점수가 높으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구조 말입니다. 입시는 분명 그런 세계였습니다. 성실하면 오르고, 실수하면 밀리고, 숫자가 곧 위치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했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해서 끝내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책과 시험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능력들이 인생의 후반부를 좌우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타이밍, 감각, 관계, 회복력, 생활력, 운. 이런 것들은 수능 성적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놀랄 만큼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학벌 좋은 사람이 나중에 자기보다 학벌은 낮지만 훨씬 부유해진 사람을 보며 괴로워한다는 이야기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닙니다. 자신이 믿어온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경험일 것입니다. 나는 분명 정답에 가까운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결과를 내놓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능력과 학벌은 별개의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책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이 길수록 세상의 날것 그대로의 생존법을 익힐 기회는 적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 짧은 청춘의 성취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평생을 그 그림자 속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연약하고도 입체적인 인간의 모습일 테지요.
그럴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인생은 시험처럼 공부해서 점수가 나오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어쩌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서울대에 들어가는 일만큼이나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모두의 기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서울대를 나왔으면 얼마나 많은 칭찬을 받으며 살아왔겠습니까. 잘한다는 말, 대단하다는 말, 앞날이 기대된다는 말. 그 말들은 분명 힘이 되었겠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기준선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자란 사람은 실패해도 그러려니 합니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를 등에 업고 살아온 사람이 좌절할 때, 그 무게는 전혀 다릅니다. 실패의 크기가 다른 것이 아니라, 실패를 바라보는 시선의 밀도가 다릅니다.
"서울대 나왔는데 거기 갔대."
이 한마디가 어떻게 들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당사자입니다. 그 말에 무던해지면 참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무감각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니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자란다는 것이, 어느 순간에는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받은 날개가, 더 낮은 곳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한선은 어디쯤이어야 할까요?
서울대 나온 사람은 직업의 하한선을 어디쯤 두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에 딱 잘라 답할 수 없습니다. 연봉 얼마 이하, 기업 규모 어느 수준 이하, 직급 어느 단계 이하로 선을 그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한선은 객관식처럼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무엇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지, 무엇을 포기할 수 없다고 느끼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이름 있는 회사가 아니면 자존감이 무너질 수 있고, 누군가는 연봉보다 일의 의미가 훨씬 중요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일단 조직 안으로 들어가 경력을 쌓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남들이 보는 체면만으로 정한 하한선은 결국 자신을 오래 버티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인데 적어도 이 정도는 가야지", "주변에서 뭐라고 할 텐데", "사람들이 실망할 텐데." 이런 기준은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내 삶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정작 버텨야 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출근해야 하는 것도 나이고, 그 자리에서 다시 성장해야 하는 것도 나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낮은 곳에 가는 일이 아닙니다. 남의 기대 속에서 얼어붙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일입니다.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자기 납득입니다.
잠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해서 실패는 아닙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선택처럼 보여도, 그것이 나를 다시 살게 하는 선택이라면 결코 낮은 길이 아닙니다.
서울대 졸업장은 출발선에서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대신 살아주지는 못합니다. 긴 시간으로 보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점점 의미를 잃어갑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에 못 미쳤다는 좌절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이니까요. 그 마음을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대 출신에게도, 그리고 꼭 서울대가 아니더라도 기대 속에서 살아온 모든 사람에게 이런 말을 조심스럽게 건네고 싶습니다.
너무 높은 곳만 보느라 자기 발밑의 길을 모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자리에서 다시 배우고 자랄 수 있는지,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않는지. 어쩌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도 가장 인간적인 기준일 것입니다.
하한선은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마음의 높이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번뿐인 인생을 삽니다. 그러니 남들이 쉽게 말하는 "눈을 낮추라"는 문장 앞에서, 조금 더 복잡해져도 괜찮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그 말은 단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과 서사와 지난 시간을 통째로 내려놓으라는 말처럼 들릴 테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대가 큰 사람일수록 더 높은 곳을 고집하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어느 순간 기대를 내려놓는 용기가 더 필요한 걸까요? 여러분이라면 직업의 하한선을 무엇으로 정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