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소설『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남긴 가장 오래된 질문

by 윤슬


의무로 결혼생활을 하던 여자에게
진짜 사랑이 찾아오다.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읽고 나면 마음 한쪽이 오래 젖어 있습니다. 비에 젖은 도로 위에서, 끝내 차 문을 열지 못한 한 여자의 손끝이 떠오릅니다. 사랑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삶 전체를 붙잡고 있는 책임감 사이에서 얼어붙어 버린 한 사람의 시간이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한 여자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하고, 더 현실적인 질문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배웠습니다. 사랑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함께 살고, 함께 살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어느 날 사랑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고, 사랑보다는 조건과 안정, 시기와 상황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기도 전에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갑니다.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난 여자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이었던 리처드 존슨을 만났고, 전쟁이 끝나자 그를 따라 아이오와의 광활한 옥수수밭 한가운데, 윈터셋이라는 작은 마을의 농가로 건너옵니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방의 신부에게, 그곳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낯설었습니다. 여자에게 결혼 이외의 선택지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그녀는 결혼이라는 한 길 위에서 무던한 남자와 함께 살아갑니다.


남편 리처드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습니다. 가족을 책임졌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프란체스카의 감정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관계가 있습니다. 미워할 수 없을 만큼 선하지만, 그 사람 곁에서 내가 온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지는 못하는 관계. 안정적이지만 설레지 않고, 안전하지만 숨이 트이지 않는 관계. 나를 해치지는 않지만, 나를 깨우지도 못하는 관계 말입니다.


프란체스카의 결혼생활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무너질 만큼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온몸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삶. 누군가 보기에는 평온했고, 누군가 보기에는 성공적인 가정이었지만, 그녀의 내면 어딘가에는 오래 닫아둔 방 하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방의 문을 연 사람이 바로 로버트 킨케이드였습니다.


사랑은 때로 너무 늦게 찾아옵니다.


1965년 8월의 어느 더운 여름날, 남편과 두 아이들이 일리노이주 박람회에 출품할 송아지를 끌고 나흘 동안 집을 비웁니다. 모처럼 혼자 남은 그녀에게 한 낯선 남자가 낡은 픽업트럭을 몰고 나타납니다. 길을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 그는 매디슨 카운티의 지붕 있는 다리들을 촬영하러 워싱턴주 벨링햄에서 차를 몰고 온 길이었고, 로즈먼 다리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도 될 사람이었지만, 그는 프란체스카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프란체스카는 트럭에 함께 올라타 다리까지 길을 안내합니다. 그날 저녁 프란체스카는 처음 보는 이 떠돌이 사진작가를 자신의 부엌으로 초대해 차를 내고, 다음 날 저녁에는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십니다.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흐르고, 로버트는 예이츠를 인용하고, 프란체스카는 잊고 있던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를 한 남자의 아내나 아이들의 엄마로 보지 않았습니다. 농부의 집에 사는 중년 여성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 안에 아직 살아 있는 여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욕망, 아직 말라붙지 않은 감수성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프란체스카에게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진짜로 알아본다는 것은 때로 구원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를 흔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같은 사랑에 빠지지만 프란체스카는 현실의 책임감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쉽게 프란체스카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 떠나지 않았을까?”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떠나지 않은 것이 옳았다”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랑은 분명 진짜였습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가 두고 가야 할 삶도 진짜였습니다. 남편도 진짜였고, 아이들도 진짜였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진짜였고, 자신이 떠난 뒤 남겨질 사람들의 고통도 진짜였습니다.


사랑만이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책임도 현실이었습니다.


그녀가 떠났더라도 행복했을까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와 떠났더라도, 아마 끝까지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로버트의 트럭에 올라타 낯선 길을 달릴 때, 프란체스카는 마침내 자신을 되찾았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촛불 밝힌 부엌에서 춤추던 밤처럼, 몸과 마음이 모두 살아나는 시간을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떨까요?


그녀는 가족을 사랑했습니다. 남편을 로버트만큼은 사랑하지 않았지만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그녀의 영혼을 흔드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삶을 함께 버텨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둔하고 무던했을지 몰라도,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프란체스카를 더 아프게 합니다. 남편이 잔인했다면, 결혼이 지옥이었다면, 그녀의 선택은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은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낭만이 없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녀가 바라던 방식으로 사랑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많은 부부들이 그녀처럼 살아가지 않을까요?



가슴 뛰는 사랑은 아니더라도 좋은 아내, 엄마이기에 혹은 좋은 남편, 아빠이기에 살아갑니다. 사랑의 설렘은 오래전에 흐릿해졌지만, 함께 쌓아온 시간과 책임 때문에 곁을 지킵니다. 서로를 뜨겁게 원하지는 않아도, 서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루를 건넵니다.


그것은 사랑일까요? 의무일까요? 정일까요?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섞인 결혼의 현실일까요?


결혼의 현실이 사랑의 낭만을 대체하기는 어렵습니다.


결혼은 생활이고, 사랑은 감각에 가깝습니다. 결혼은 식탁 위에 놓인 공과금 고지서이고, 사랑은 갑자기 불어오는 여름 저녁의 바람입니다. 결혼은 아이의 도시락을 싸고, 병원 예약을 하고, 지친 얼굴로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입니다. 사랑은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문제는 둘 중 하나가 가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생활이 없으면 사랑은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생활은 서서히 사람을 말려갑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살지만, 밥만 먹고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붕 아래에서 살아야 하지만, 지붕만으로는 영혼이 따뜻해지지 않습니다.


프란체스카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이 평생 체념해 온 것이 단지 철없는 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필요한 어떤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로버트를 통해 알아버렸습니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욕망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프란체스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려준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체스카의 고백이 아픈 이유


나흘의 마지막 날,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합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전하는 답은 그래서 오래 남습니다. 이 고백 안에는 사랑과 책임, 욕망과 죄책감, 자유와 두려움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품에 안고 당신의 트럭으로 데려가서 꼭 당신과 함께 가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나는 불평 한 마디 늘어놓지 않을 거예요. 당신 말 한마디에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감각적이고, 내 감정을 너무나 잘 아니까요.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래요, 이렇게 사는 것은 지겨워요. 내 인생 말이에요. 낭만도, 에로티시즘도, 촛불 밝힌 부엌에서 춤을 추는 것도,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남자의 멋진 감정도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이 생활에는 당신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내게는 지독한 책임감이 있어요. 리처드에게, 아이들에게. 내가 그냥 떠나 버리면, 내 육체적인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리처드에겐 너무나 힘들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그를 파멸시킬지도 몰라요.


그보다도 더 나쁜 것은, 그가 여생을 이곳 사람들의 속닥거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 거라는 점이에요. ‘저 사람은 리처드 존슨이야. 부인은 화끈한 이탈리아 여자였는데, 글쎄 몇 년 전에 장발의 사진사랑 줄행랑을 놓았지.’ 리처드는 그 고통을 겪어내야 할 것이고, 아이들은 이 고장에 사는 한은 윈터셋 사람들의 조소를 들어야 할 거예요. 그들 역시 고통을 겪겠죠. 그리고 나를 미워할 거예요.


나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당신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책임감이라는 현실로부터 내 자신을 찢어내 버릴 수가 없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함께 가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나도 도리가 없어요. 내겐 힘도 없어요. 느낌이란 느낌은 다 당신에게 주어버렸으니까. 당신을 구속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간다면 그건, 이기적으로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제발 나를 그렇게 만들지 말아요. 내가 책임감을 내던져 버리게 하지 말아요. 그럴 수도 없고, 그런 생각을 지니고 살 수도 없어요. 만일 내가 지금 떠난다면, 떠난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에요. 당신이 사랑하게 되었던 그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릴 거예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 말이 아픈 이유는 프란체스가 로버트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로버트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지 못합니다. 로버트를 사랑하는 자신도 진짜이지만, 책임을 저버린 자신은 로버트가 사랑한 바로 그 여자가 아닐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사랑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떠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때로 함께 가는 용기가 아니라, 함께 가지 않는 고통으로 증명됩니다.


단 한 번 오는 확실한 감정


로버트의 말 역시 오래 가슴에 남습니다. 떠나기 전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한 마디를 남깁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면서요.



할 이야기가 있소, 한 가지만. 다시는 말하지 않을 거요, 누구에게도. 그리고 당신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 문장은 잔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감정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비슷한 사람은 만날 수 있고, 비슷한 장면은 다시 찾아올 수 있지만, 그때의 나와 그때의 그 사람과 그때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로버트가 말한 “확실한 감정”은 단순한 설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 전체가 한 사람을 향해 정확히 기울어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의심할 수도 없는 감정. 세상은 불확실하고, 삶은 애매하고, 관계는 늘 흔들리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 말입니다.


이런 사랑을 일생에 한 번 한 것도 행운이지 않을까요? 한 번도 못한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좋은 사람과 살지만, 단 한 번도 자기 영혼이 완전히 깨어나는 사랑을 만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정적인 결혼 안에서 존중받지만, 깊은 밤 문득 “나는 정말 사랑받아본 적이 있었나?” 하고 묻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만났지만, 그 사랑과 함께 살아갈 현실을 마련하지 못해 평생 그리움만 안고 살아갑니다.


삶은 자주 불공평합니다. 사랑과 결혼과 타이밍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도착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결혼을 하며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함께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 안에 “당신을 평생 설레게 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은 없습니다.


어쩌면 결혼은 설렘의 제도가 아니라 지속의 제도에 가깝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을 보고, 같은 집으로 돌아가고, 서로의 부족함을 견디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고단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시작했더라도 결국 생활의 문법으로 번역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마음은 외로워집니다. 좋은 배우자와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은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의 감정이 모두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과 누군가에게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흔들린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는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앞에서 그녀는 원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도 엄마도 아닌, 한 여자로서 바라봐지는 사람. 기능이 아니라 존재로 사랑받는 사람.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때로 사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서보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 곁에서 더 깊이 살아납니다.


그래도 그녀는 남았습니다.


프란체스카는 결국 남습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가 그 선택을 쉽게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압니다. 그녀의 남음은 체념이면서 동시에 의지였고, 희생이면서 동시에 자기 보존이었습니다.


그녀는 로버트를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로버트와 함께 떠난 자신이 감당해야 할 파괴를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겪을 모욕, 아이들이 견뎌야 할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죄책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후반부의 한 장면은 더욱 잊히지 않습니다. 몇 년 뒤, 비 내리는 윈터셋의 어느 거리에서 프란체스카는 남편이 운전하는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신호등 앞에서 자기들 차 바로 앞에 멈춰 선 또 다른 낡은 픽업트럭을 발견합니다. 로버트의 트럭이었습니다. 비를 맞은 그가 이쪽을 돌아봅니다. 그녀는 차 문 손잡이를 잡습니다. 손가락이 하얗게 변할 만큼 꽉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문을 열지 못합니다. 신호가 바뀌고, 트럭은 빗속으로 떠나갑니다.


그 짧은 신호등의 시간 동안, 그녀는 평생 한 번 더 자신의 인생을 다 걸 뻔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첫 번째 선택보다 더 무거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만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때로 사랑은 사람을 더 깊은 고통으로 데려갑니다. 특히 그 사랑이 이미 누군가의 삶 위에 세워져 있을 때, 그 사랑은 순수한 만큼 잔인해집니다.


그래서 프란체스카의 선택은 더 먹먹합니다. 그녀는 낭만을 버리고 현실을 택했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그녀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아닙니다. 결혼의 현실은 사랑의 낭만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녀는 그 빈자리를 품고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모두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함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견디는 일.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선택하지 않은 삶의 그림자를 평생 데리고 가는 일 말입니다.


사랑은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은 나흘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흘은 사십 년보다 깁니다. 어떤 만남은 짧게 끝났다는 이유로 작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남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함께한 시간이 길수록 사랑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곁에 있어도 나를 모르고, 어떤 사람은 며칠 만에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알아봅니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잊고 살았던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 준 사람.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던 감정을 다시 믿게 해 준 사람. 그래서 그는 떠났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프란체스카 역시 로버트에게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떠돌며 살아온 그에게 처음으로 머물고 싶은 마음을 준 사람. 세계를 사진으로 바라보던 남자에게, 사진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


그들은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생애 안에 가장 깊이 남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로버트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그의 유품을 받습니다. 그가 평생 들고 다니던 카메라와, 그녀에게 보내려고만 했던 편지들, 그리고 그녀가 두고 온 작은 목걸이. 그제야 그녀는 압니다. 그도 자신처럼, 평생 그 나흘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처럼, 그 사랑을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프란체스카 역시 자신의 유언을 통해 답합니다. 자신을 화장하여 로즈먼 다리 근처에 뿌려달라고. 한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자리, 남편 곁에서 늙고 묻혀야 마땅했던 자리를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살짝 비켜둡니다. 그것은 산 자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살아 있던 한 진실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두 자녀 마이클과 캐롤린은 어머니의 유품에서 일기와 편지를 발견하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지만 곧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들을 위해 떠나지 않았던 그 어머니가, 떠나지 않은 대가로 가슴 한쪽에 무엇을 묻고 살았는지를.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단지 프란체스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함께 살기로 한 사람을 사랑하려 애쓰고 있습니까?

지금의 삶을 지키기 위해 놓아 버린 감정이 있습니까?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묻어둔 낭만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정이 된다고. 설렘은 사라지고 책임이 남는다고. 그것이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정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책임으로 버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끔 자신이 사랑받고 싶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온 어느 날 갑자기 깨닫습니다.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란체스카처럼 남을 수도 있고, 로버트의 손을 잡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결혼의 현실이 사랑의 낭만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지켜줍니다. 그러나 낭만은 우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결혼은 삶을 지속하게 하지만, 사랑은 때로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픕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프란체스카는 떠나지 않았지만,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버트는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잃었지만, 서로를 통해 자기 생의 가장 진실한 순간을 얻었습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사랑은 충분히 도착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한 집에서 늙어가지 못했더라도, 같은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지 못했더라도, 서로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더라도 말입니다.


일생에 단 한 번, 나를 완전히 흔들고 깨우는 사랑을 만났다면 그것은 불행일까요? 행운일까요?


저는 아직 답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오래 생각하게 됩니다. 떠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 떠났다면 무너졌을 사람의 마음. 남았지만 결코 잊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현실의 책임과 단 한 번뿐인 사랑이 동시에 찾아온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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