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의 빼앗긴 봄을 위한 변론
역사는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조선왕조 오백 년을 통틀어, 정순왕후 김씨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아온 왕비도 드물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 정조를 평생 위협한 악의 축, 수렴청정 기간 동안 자행된 신유박해의 주도자. 드라마와 영화는 그녀를 탐욕스럽고 냉혹한 정치가로 그려왔으며, 우리는 오랜 시간 그 서사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잠깐, 멈추어 봅니다.
역사는 늘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보다 먼저 자리와 제도를 적어 놓습니다. 그녀가 어느 집안의 딸이었는지, 왜 국혼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 뒤 가문이 어떤 정치적 기반을 갖게 되었는지는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날, 한 어린 소녀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처음 궁궐의 문을 넘어섰을 때, 그 나이는 고작 열여섯이었습니다.
숙종의 유지,
그리고 열여섯 소녀에게 내려진 운명
1759년,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었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1757년 승하한 뒤, 새 왕비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한 간택 그 이상의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영조에게는 총애하는 후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왕비로 승격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명문화된 법이었습니다. 《숙종실록》 27년(1701년) 10월 7일 기사에 따르면,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면서 "이후로는 빈어(嬪御)에서 후비(后妃)로 승격되는 일을 엄하게 금지한다"는 유지를 남겼습니다. 후궁이 왕비가 되는 일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엄명이었습니다. 희빈 장씨의 비극이 왕조 전체의 금법이 된 것입니다.
이 유지 하나가 열여섯 소녀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영조는 반드시 외부에서, 사대부 가문의 처녀 중에서 새 왕비를 골라야 했습니다. 경주 김씨 가문의 딸은 노론의 핵심 혈통이었고, 그렇게 간택의 손길이 그녀에게 닿았습니다. 국가의 법이 한 소녀의 삶을 가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녀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가 개입될 여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간택은 선택이 아니라 명이었고, 가문에게 그것은 영광이었을지 모르나, 당사자인 소녀에게 그것이 곧 영광이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열여섯, 그리고 예순여섯
숫자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면 어지럽습니다. 영조는 1694년생, 정순왕후는 1745년생, 혼인은 1759년.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오십 남짓. 그녀가 태어나던 해, 영조는 이미 보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군왕이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당신이 지금 열여섯 살이라면, 예순이 훌쩍 넘은 왕과 기꺼이 결혼하겠습니까?
대부분은 망설일 것입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싫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 나이의 소녀가 품는 설렘이란, 또래 청년의 눈빛 속에 있고, 함께 늙어가는 미래에 대한 상상 속에 있는 것이지, 손자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결혼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열여섯 살의 딸이나 조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이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궁이 좋고 왕비가 되는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의궤와 실록에는 혼례의 절차와 의식이 상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려하다는 말과 행복하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국가의 축복을 받는 결혼이 반드시 한 개인의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위해 해협을 건너는 여성들
요즘도 우리 주변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으로 시집오는 젊은 여성들. 그녀들의 남편이 아버지뻘, 때로는 할아버지뻘인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들을 향해 냉정한 시선을 보냅니다.
"돈 보고 온 거 아니야?"
"진짜 사랑이 아니잖아."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얻기 위해, 어쩌면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어서, 그 먼 길을 건너온 여성들이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생존으로, 혹은 가족을 위한 헌신으로 맺어진 결혼. 그 결혼이 불순하다고, 진심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치열하고 진지한 삶의 선택이 아닐까요?
정순왕후 역시 그런 구조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조선의 양반가 여성에게 결혼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왕실의 간택이 내려졌을 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명이었고, 가문 전체의 명운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은 자기 소망보다 먼저 제도에 의해 선택됩니다. 누군가는 사랑보다 가문으로 결혼하고, 누군가는 성격보다 자리로 불리며,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보다 역할로 생을 마칩니다. 그녀가 입궐한 것이 탐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그 시대와 그 계급이 그녀를 그 자리로 밀어 넣은 것인지 — 우리는 그 경계를 너무 쉽게 재단해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아들과 며느리,
그 기묘하고 숨 막히는 고립
왕비라는 자리는 만인지상의 자리입니다. 화려한 대수머리를 얹고 적의를 걸친 그녀의 겉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찬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처소의 문이 닫히고 나면, 그녀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그녀가 들어간 궁궐은 비어 있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영조의 오랜 통치가 만들어 놓은 질서가 있었고,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사도세자가 있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내, 훗날 《한중록》을 쓰게 되는 혜경궁 홍씨도 있었습니다.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 이산은 그녀보다 불과 일곱 살 어렸을 뿐입니다. 그녀는 누군가의 친모로 궁에 들어온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권력의 집 안으로 뒤늦게 편입된 젊은 왕비였습니다.
까마득하게 나이 많은 아들과 며느리가 매일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며 땅에 엎드려 절을 할 때, 열여섯의 소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을까요. 겉으로는 지극한 예의가 오갔겠지만, 그 이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어색함과 긴장이 흘렀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녀를 진심으로 어머니나 어른으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며, 속으로는 나이 어린 계모를 경계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자리가 높아 보인다고 해서, 그 자리가 곧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추측이지만, 그 구조 자체가 주는 압박만큼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궁궐에서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차가운 가면을 써야만 했을 것입니다. 권위라도 내세우지 않으면 그 숨 막히는 암투 속에서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싶었을,
이루지 못한 꿈
정순왕후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후사가 없었는지, 건강의 문제였는지, 궁중의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확인된 사료로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 지점에서 정직한 답은 하나입니다. 모릅니다.
다만 이 사실 하나가 그녀의 삶을 더욱 쓸쓸하게 읽히게 만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조선 왕실에서 후사가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생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안정감, 발언권, 기억되는 방식 모두와 연결된 일이었습니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없다는 그 지독한 공허함이 그녀의 내부에서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빈자리가 있었다는 것만은 압니다.
만약 그녀가 왕비로 간택되지 않았다면, 비슷한 연배의 다정한 선비를 만나 혼례를 올렸을 것입니다. 밤이면 지아비와 속삭이고, 아침이면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재롱에 시름을 잊는, 그런 평범하고도 따뜻한 삶. 그 삶이 그녀에게 허락되었다면 역사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억되지 않는 삶이, 때로는 더 행복한 삶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품은 것이 과연 이상한 것인가?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했습니다. 그녀는 왕대비가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높은 지위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은 이제 정조였습니다. 그녀의 가문 경주 김씨 노론 벽파 세력과 정조 측의 갈등은 깊었고, 실록에는 그 주변 인물들이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려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정조의 재위 24년 동안 그녀는 대비의 자리에 있되, 조용했습니다. 수렴청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조는 열한 살이었습니다. 그제야 — 그녀 나이 쉰다섯에 —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의 발을 내렸습니다. 열여섯에 입궐하여 무려 40년의 세월을 버텨낸 끝에 처음으로 자신이 결정권자가 되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그녀를 비난합니다. 권력욕, 야망, 정치적 음모.
하지만 저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질문하고 싶습니다. 정말 궁궐이라는 곳에서, 그것도 어린 나이에 들어온 여성이 권력을 전혀 품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궁궐은 사랑만으로 굴러가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예법과 혈통, 시선과 소문, 가문과 정파가 얽혀 사람을 자리로 바꾸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권력을 욕망했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는 생존의 문법을 익혔다는 말과도 겹칩니다.
열여섯 살부터 그 긴 세월을 궁궐 안에서 버텨온 여인이, 쉰다섯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었다면, 그것을 욕심이라고만 불러야 할까요?
물론 이것이 정순왕후의 정치적 책임을 지워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욕망을 단죄하기 전에, 그 욕망이 자란 환경을 먼저 보자는 뜻입니다.
악녀라는 말은 너무 쉽습니다.
신유박해는 역사적으로 비극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 안에는 무고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역사는 그 과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녀의 정치가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몇 가지 정치적 행위로만 환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결과가 남고, 사람에게는 사정이 남습니다. 그런데 사정은 대개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기록된 결과를 보고 인물을 재빨리 재단합니다. 악녀라는 두 글자는 판단은 빠르지만 설명은 가난합니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어, 이미 형성된 왕실 질서 속에 뒤늦게 편입되고, 자녀 없이 오랜 세월을 견뎌내고, 마침내 가장 늦게 권력의 중심에 선 한 사람의 생애를 그저 탐욕 하나로 묶어버리면, 우리는 설명의 편의를 얻는 대신 인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쩌면 그녀가 원했던 것은?
여기부터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해석과 상상입니다.
어쩌면 그녀도 평범한 삶을 바랐을지 모릅니다. 왕비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로, 아이를 기르고 계절을 건너며, 정치가 아니라 생활의 시간 속에서 늙어 가는 삶. 만약 그녀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차가운 어좌 뒤의 발을 거두고, 따뜻한 온돌방에서 사랑하는 지아비와 아이들의 옷을 지으며 살아가기를 주저 없이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그녀를 변호하고 싶다기보다, 먼저 질문하고 싶습니다. 만약 내가 그 나이에, 내가 고를 수 없는 결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면, 나는 정말 아무 욕망도 품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절하고 모두가 살피는 자리에서, 나는 끝내 권력의 언어를 배우지 않았을까요? 인간은 자신이 놓인 환경의 말을 닮아가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놀랍도록 오래 살았습니다. 1745년에 태어나 1805년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예순이었습니다. 열여섯에 입궐하여 마흔네 해를 궁궐 안에서 보냈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삶의 방향을 선택하지 못했던 그 긴 세월이 그녀의 몸 어딘가에 모두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정순왕후를 다시 읽는다는 것
정순왕후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그녀를 미화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료가 보여 주는 정치적 책임은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그 책임 앞에 한 인간의 시간도 함께 놓아 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정순왕후의 굳게 다문 입술을 떠올려 봅니다. 그 입술 사이로 차마 뱉어내지 못한, 빼앗긴 열여섯의 봄날을 향한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녀가 품었던 그 독한 권력욕은, 어쩌면 사랑받고 싶고 살아남고 싶었던 한 평범한 인간의 가장 서글픈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그녀를 대비로 기록했습니다. 왕비로 기록했고, 수렴청정을 한 인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에세이는 그 기록의 가장자리에서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호칭을 받기 전에, 그녀는 어떤 얼굴의 소녀였을까? 사람들이 절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는 법부터 배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끝내 권력의 사람이 되었을 때조차, 마음 한구석에는 자기 생을 한 번도 스스로 고른 적 없다는 서늘함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 답을 모릅니다.
다만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더 함부로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정순왕후의 묘는 영조의 무덤 옆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시대를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숨 쉬었던 인간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 이해가, 26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녀에게 닿기를 조용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