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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15. 2019

누구나 알에서 깨어난다

[데미안]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시간이 지나면서 이 말의 깊이를 생각해 본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진즉 포기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찌 남을 알겠는가?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데미안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다. 당시 나는 약간 지적 허영이 있었는데 어려운 책을 읽었다는 데서 오는 오만방자함이 있었다. 데미안은 청소년이 읽어야 할 필독서 리스트에 있었고 그 필독서 리스트를 다 읽고 말겠다는 야무진 계획의 일환이었다.


어려운 뒷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억지로 억지로 읽었고 앞부분은 비슷한 나이대 이야기라 몰입해서 읽었다. 주인공이 타락의 길(?)로 가는 과정이 안타깝기도 했고 나도 주위에 흔히 말하는 ‘까진 애’들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가정이라는 이상적인 세계와 외부의 현실 세계에 대한 분리는 그 시절 나도 느끼는 바였다. 주인공이 느끼는 혼란과 갈등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중학교 때 학업보다는 친구들과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데에 집중했고 어른들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득했다. 부모님의 삶도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았다. 읽으면서 뜨끔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비밀로 간직하던 것을 들킨 기분이랄까? 읽는 내내 내 속마음을 내가 들여다보는 듯했다. 부모님에 대한 반항, 금지된 것에 대한 열망. 반에 있던 불량 급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려움, 궁금, 이질감, 동경 등이 복잡하게 섞여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교육받은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나도 알로부터 깨어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이제야 불행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절 과감히 주인공처럼 고뇌하지도 반항하지도 못했다. 부모님의 세계에 별다른 저항 없이 순응한 체 지나갔다.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부리로 쪼다가 그냥 포기한 채 나는 어른이 되었다. 몸만 어른 인체 마음은 어른이 되지 못했다. 내가 부모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사람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의 특성상 많은 부분 부모에게 의지하고 그게 당연시되는 부분도 있다.


내가 완전히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의 그 충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강한 나를 느꼈고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있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전에 나는 내가 생각한 바가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하면 심하게 흔들렸다. 특히 부모님의 의견에 심하게 동요되곤 했다. 내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려서는 안된다는 사고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알에서 깨어나야 했다.


주인공이 사춘기 시절 있었던 혼란의 경험을 난 성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책을 읽어보니 내가 사춘기 시절 좀 더 처절하게 보냈다면 나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성인인 된 후 나의 혼란과 절망, 고뇌들이 좀 더 가볍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토록 알에서 깨어나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엄한 가정환경 때문이었는지... 나의 성향이었는지... 분명한 것은 이제 난 깨어났고 불행히도 아직도 알속에 갇혀있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성장한다. 어른이 된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마마보이, 마마걸 말이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경제적 이유를 빌미로 여전히 알속에서 머무르려 한다. 온전한 자아를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책임을 수반하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아직도 “엄마한테 물어봐야 돼”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부모님은 나 자신이 아니며 언제가 돌아가시고 내 옆에서 사라지신다. 그때는 아무리 알 속에 있으려 해도 알이 저절로 깨어져 버릴 것이다. 그 순간이 누군에게나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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