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신탁받은 자...

by 윤슬

신탁이 있었다.


"장차 이 아이가 최고의 영주가 될 것이다"


우렁차게 울고 있는 갓 태어난 사내아이를 보고 예언자가 말했다. 만족한 듯한 부부는 사례를 하고 돌아서 나갔다. 혼자 남은 예언자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비의 영주를 파괴하고 새로운 영주를 건설하리라..."


영주는 흡족해했다. 10년 만에 얻은 아들이었다. 아들이 최고의 영주가 된다니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헨리로 정하겠다. 헨리 자르젠! 최고의 영주가 되어 다오"


헨리를 위해 최고의 무사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최고의 현자에게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헨리는 무럭무럭 자라 10살이 되었다.


"너의 검 상대란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또래 아이가 있었다. 헨리는 그 아이에게 검을 던졌다.


"실력 한번 볼까?"


아이는 헨리가 휘두르는 검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아이의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고 거의 기진맥진할 때쯤이었다.


"합격이야. 넌 이제 나의 검 상대야. 너의 이름은 뭐지?"


"루카스"


루카스는 헨리 유모의 아들이었다. 둘은 검 상대인 동시에 친구가 되었다. 헨리는 언제나 나이 많은 스승과 지내다 보니 또래 친구는 처음이었다.


헨리가 16살이 되던 해였다. 극심한 가뭄이 생겼다. 곡식 수확량이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영주에게 받쳐야 할 세금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그것은 안 돼요. 우리는 뭘 먹고살아요? 제발요..."


여자가 애걸복걸을 하였지만 집행관은 막무가내였다.


"그럼 딴 곳으로 떠나. 여긴 여기 법이 있다고"


헨리는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 통 루카스가 보이지 않는다. 심심하기도 하고 심술이 났다.


"루카스는 도대체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야?"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루카스가 들어왔다.


"미안! 좀 늦었어"


"요즘 뭐 하고 다녀? 나한테 친구는 너 하나밖에 없는 것 너도 잘 알잖아!"


루카스는 다정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헨리를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검 상대는 없어도 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원래 난 너의 검 상대 아니 검 연습용이었어. 친구?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왜 그래? 어색하게... 우리 그동안 지낸 것은 뭐야?"


"난 너의 놀이 상대였지. 이제 그만할게. 다른 놀이 상대 찾아봐. 너와 나는 가는 길이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거야?"


"너 지금 성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아? 가뭄에 곡식도 없는데 세금 내고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야. 넌 고작 심심하다는 말이 나와?"


정보가 차단되어 헨리는 전혀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잘 들어. 난 사람들과 폭동을 일으킬 거야. 이 성을 털 거라고... 그나마 너와의 우정으로 말하는 거야.

내가 이 성에 다시 올 때 너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충격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헨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잠깐 내가 어버지에게 말해 볼게. 방안을 강구해 볼게."


필사적인 헨리의 말에 루카스는 조금 누그러졌다.


"폭동은 3일 뒤야. 그전에 너희 아버지가 그동안 강제로 걷어들인 세금을 돌려주고 앞으로 새로운 세금 체계에 대해 우리와 협상하겠다는 공표가 없으며 강행할 거야. 잘 들어. 우리는 잃을 것이 없고 숫자도 훨씬 많아"


헨리는 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어요. 아버지"


"굶어죽는 사람은 언제나 있단다. 헨리"


"지금은 위기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세금은 덜 걷고 있어"


"더 많은 온정이 필요해요"


"헨리...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는 없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 거야."


단호한 아버지의 태도에 헨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헨리의 고민은 더 깊어져만 갔다. 방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지나가던 유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련님 아직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루카스의 엄마 유모였다. 헨리에게도 엄마 같은 존재였다.


"어릴 때처럼 자장가 불러줘요. 그럼 잠이 올 것 같아요."


유모는 침대에 헨리를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나른해져 오는 헨리는 유모를 바라보며 물었다.


"루카스한테도 이 자장가 불러줬어요?"


"도련님한테 불러 준다고 제가 언제 불러줬겠어요? 루카스는 혼자 자랐어요. 자주 얼굴도 못 봤는데 보채지도 않고 루카스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한 켠이 짠하죠. 어머 제가 별말을 다 했네요. "


유모는 눈물을 훔치며 방을 나갔다.


유모가 나가자 헨리는 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카스 집에 도착했다. 밤이 늦었지만 루카스는 없었다. 한참을 지나자 루카스가 돌아왔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래 영주님은 설득해 봤어?"


"난 말야. 한 번도 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너의 배려를 당연하다고 여겼나 봐."


"무슨 말이야?"


"너에게서 엄마를 빼앗아 간 것 미안해."


루카스는 상념에 잠긴 듯이 말했다.


"난 널 증오했었어. 증오했는데... 강아지마냥 내 품에 파고드는 널 결국에는 좋아하게 되었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루카스는 말했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어. 대신 나도 돕게 해줘.... 성 내부는 내가 잘 알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


"진심이야? 그럼 내일 우리 모임에 나와. 거기서 찬반 투표를 할 거야."


다음날 밤이 되었다. 헨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루카스와 비밀모임에 참석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의심의 눈초리로 헨리를 보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영주의 아들 헨리입니다. 비록 저의 아버지이지만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아들로서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여기 루카스와는 10살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아니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는 동등해야 친구입니다. 그러나 저와 루카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과 제가 꿈꾸는 세상이 같습니다. 제가 힘이 되겠습니다."


사람들의 환호가 쏟아졌고 헨리를 외치는 구호가 넘쳐났다.


폭동 당일. 헨리가 성문을 열었고 곡식창고와 보물창고는 털렸다. 성을 지키던 군사는 모두 제압당했고 사람들 앞에 영주 헨리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당신의 죄를 생각하면 죽어 마땅하지만 당신의 아들을 보고 살려 주겠다."


사람들의 회의를 통해 새로운 영주로 헨리가 결정되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넘쳐났고 헨리는 새로운 세금 방안과 앞으로 운영에 대해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신탁이 틀렸군."


헨리의 아버지는 한탄하며 말했다.


지나가던 예언자는 성을 보면서 말했다.


"신탁이 이루어졌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