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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0. 2018

세상의 거친풍파를 지나온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인 조르바는 나에게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여성을 대하는 생각이나 태도,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흥적이고 다소 도발적인 삶의 자세가 불량스럽고 태만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삶 이면에 치열한 삶의 고민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조르바를 이해하게 되었다. 삶을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부딪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일종에 경외감 같은 것이 든다. 나는 일단 그런 경험이 없다. 있다 해도 어디서 주워들은 간접경험밖에 없는지라 그들이 하는 말에는 힘이 느껴진다. 조르바 같은 사람을 볼때마다 난 참 인생에 대해서 잘 모른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보기에는 난 온실 속 화초 같을 것 같다. 야생이라면 아마 먹이사슬 맨 아래에서 잡혀 먹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먹이사슬에서 맨위에 생존하는 동물같다.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해 왔다.’ 

  죽음에 대해 우리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후회없이 살아라는 말이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 사는 것이랑 비슷하다고 조르바는 생각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거라 곧 죽을 것처럼 사는 것이랑 뭐가 다를까? 둘 다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매일 이 말을 새겨야지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가끔 누군가의 부고를 듣게 되면 그제서야 이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내 일상의 게으름으로 내일하면 되지... 다음에 하면 되지... 이러면서 하루 이틀 미루게 된다. 그러면서 영영 하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유한하지 않음을 인식하지 못하면 인간은 한없이 나태해 진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어요. 당신은 젊으닌깐 참고 기다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감히 선언합니다만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더 거칠어질 겁니다. 어느 놈도 사람이란 나이를 먹으면 침착해진다는 소리를 못하게 할 겁니다.’

  나이가 먹으면 수학적으로 죽음에 더 가까워 진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조급해지고 초조해 진다. 이글을 읽고 꽃보다 할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명소에 가서 한분이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렇게 말하는데 가슴이 찡해져 왔다. 나이를 먹으면 참고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이 참 슬프지만 사실이다. 나이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산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삶에 대해 이렇게 간단하게 한 줄로 요약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는 동안 계속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불행도 반복된다. 우리는 앞으로의 삶이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알지만 말이다. 아예 이렇게 마음 먹고 산다면 사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불행이 와도 그래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면 노여워 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삶에 대해 관조해 버린 조르바의 삶의 철학이 느껴진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는 말. 이 말은 그 동안에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게 많이 살아봤기에 아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순리를 거스를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다. 조르바가 젊은 시절에는 꽤나 말썽을 피우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살면서 자연의 순리를 알게 되고 부질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젊은 조르바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게 젊은 시절에는 무서운 것이 없다. 세상이 다 내 뜻대로 흘러갈 것이라 생각한다. 무모한 도전도 하고 실패도 경험한다. 그런한 경험을 통해 조르바와 같은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게 된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조르바에게 가장 부러웠던 점이다. 그는 모든 것을 실제 경험으로 습득했다. 그의 몸에는 온통 상처들로 가득 찬 실제 삶의 경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이들은 삶을 어떻게 바라볼까?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은 말에도 힘이 있고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 삶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확연한 생명력이 있다. 어쩔 때 보면 잔인해 보이고 동물적 감각으로 삶을 영위하는 모습에 감탄을 자아낸다. 나와 같이 글로서 이해하려하고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살아있는 무언가 말이다. 본질을 꿰뚫어 본다. 생존이라는 전장에서 무수한 싸움을 했고 잔뼈가 굵은 조르바는 촌철살인의 한방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내 친구가 떠올랐다. 영업을 하는 친구인데 한번은 만나서 나랑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너무 순진하다면서 난 말로 너한테 5천만원은 뜯어낼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기분이 나빴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나의 상황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라는 안전한 울타리안에서 지내다보니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경쟁력도 없고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는 사람. 어쩌면 이게 나의 정확한 주소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세상풍파에도 이겨낸 그가 부러워졌다. 조르바한테 나는 이용만 당할 테지만 이런 나의 상황이 무섭고 두렵다. 회사밖을 나가기전에 조르바같은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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