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장편소설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를 폈다. 아마 열 번쯤 다시 읽는 책인 것 같다.
나는 평소에도 활자 중독인데 마음이 싱숭생숭 할 때에 더 글자 읽기에 매달린다. 새로운 책을 읽지는 못한다. 집중력이 흩어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용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멀쩡하고 건강한 정신일 때에 새로운 책들을 열심히 읽어두고 휴식이 필요할때면 그 때 읽어뒀던 책들을 천천히 다시 읽는데 <시선으로부터,>도 그 중에 한 권이다. 채식 동물이 씹고 삼킨 것을 다시 토해 씹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다.
이 책은 심시선이라는 멋진 할머니의 가족 이야기로 등장 인물이 아주 많은 소설이다. 처음 읽을 때에는 책 첫 장에 있는 가계도 사진을 찍어서 메모 앱에 붙여넣고 노트를 하면서 읽었다. 인물 이름이 복잡하고 많은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에나 가계도를 그려놓고 이름 옆에 메모를 했는데 이걸 또 하게 되다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처음 읽을 때에는 계속 '우윤이 누구 딸이더라...' '지수가 상헌이랑 결혼했었나' 하면서 가계도를 뒤적였다. 이름을 잘 외우는 사람은 이렇게 등장인물이 많은 책을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건가? 갑자기 그 감각이 궁금해진다.
심시선의 맏 딸, 명혜의 주도로 시선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은 시선의 제사를 지내러 하와이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 시선의 제사상에 올리자는 명혜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각자는 여행을 시작한다. 생각보다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하와이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코로나가 시작하기 전에 좀 다녀와봤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도를 다운로드 받았다. 여행이 가능한 날이 오면 이 책을 들고 하와이에 다녀올 것이다.
소설은 총 31장으로 끝나는데 매 장은 심시선의 인터뷰, 쪽글, 저서의 일부를 편집한 모양새로 시작한다. 가상 인물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마치 정말로 있었던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심시선이라는 작가가 쓴 글'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을 때에는 심시선에게 감동을 받은 것인지 정세랑에게 감동을 받은 것인지 헷갈렸다. 심시선의 말들은 나도 저렇게 멋있게 늙고싶다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내 손에 쥐여주는 것 같았다. 몇몇 이야기는 내 얘기 같기도 했다.
p125
14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기분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선, 어찌 살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마티아스 마우어는 그런 면에서 예방주사에 가까웠던 셈인데, 그런 예방주사 두 번 맞았다간 죽을 일이었다.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 『잃은 것들과 얻은 것들』(1993)에서
살갗에서 화약 냄새가 폴폴 나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들을 알았다.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하며 폭력으로부터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다는 문장에도 크게 공감했다.
일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문단도 이 책에서 찾았다.
p248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었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조금만 사랑하자니, 유순하게 길들여진 작은 것만 골라 키우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소소한 행복에서 의미를 찾자, 바깥의 평가보다 내면이 충실한 삶을 택하자는 요즘의 경향에 남녀 중 어느 쪽이 더 동의하는지 궁금했다. 내면이 충실한 삶은 분명 중요한데, 그것이 여성에게서 세속의 성취를 빼앗아가려는 책략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성취를 하려니 생활이 망가지고, 일만 하다가 죽을 것 같고......
책을 처음 읽을 때 나는 계속되는 텐투텐(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근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일을 사랑해서 하고 있는게 아니라 일이 날 사랑해서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존나 버텨'야 대기업에선 승진이라는 걸 하게 되는 걸까 궁금했다. 세속의 성취를 위하자니 매일 몸이 아팠다. 책을 읽고 있던 늦은 저녁에도 까똑 까똑하고 울리는 업무 메시지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좀 울었던 것도 같다.
나는 이 책을 계기로 정세랑 작가의 모든 책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보건교사 안은영』, 『옥상에서 만나요』,『목소리를 드릴게요』 등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시선으로부터,』 만큼 읽고 또 읽게되는 책은 없었다. 예전에 사놓고 읽기를 미뤄두었던 『피프티 피플』도 다시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이 정세랑 작가에게 제대로 입덕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정세랑 작가의 다정한 문장들을 사랑한다. 김보라 감독의 추천사처럼 나도 이 책을 읽으며 무척 행복했다. 이 세계가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그리고, 가부장제에 포섭되지 않은 어른 여성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했다. 심시선은 소설속의 인물이지만 힘든 시기를 지나는 나에게 그 어떤 멘토보다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이 멋진 작품이 오래도록 많은 여성들에게 읽히고, 그들도 심시선이라는 멋진 할머니를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