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 아동을 둔 엄마는 긴 방학 동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적 압박을 느꼈다.
방치
'비장애 아동을 둔 엄마들도 이런 말을 많이 쓰나?'
문득 든 생각인데 장애아동의 엄마들은 이 단어를 정말 많이 쓰고 듣는다.
"아무것도 안 하면 제가 아이를 방치하는 것 같아서요."
"하루 종일 유튜브만 보여줬어요. 아휴 아이를 너무 방치했네요."
발달장애 아이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하고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아이랑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해서 가보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의 추천은 분명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체험? 보호자가 동반인가? 어렵지는 않을까? 집중할 수 있을까? 시간이 길지 않을까?
관람? 착석 유지가 될까? 소리를 지르지 않을까?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까?
전시? 아이가 만지면 어쩌지? 막 뛰어다니다가 망가뜨리진 않을까?
엄마에게 자유시간을 주는 키즈카페 조차도 내부의 규칙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에 장애 부모 아동들은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제지하고 보조하느라 그 안에서 앉아있을 여유가 없다. 장난감이 많은 키즈카페는 규칙이 엄격한 경우가 많고, 미디어가 많은 키즈카페에서는 감각적 예민함으로 인해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돈이 아까운 경우가 많다. 9살이 되고 10살이 되어도 혹시나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해를 입힐까 봐, 직원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릴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키즈카페에 혼자 보낼 수가 없는데, 보호자 요금까지 내야 하는 억울함. 어쨌거나 엄마들은 싸고 좋다는 키즈카페보다 별거 없어도 신체활동이 많고 신경이 덜 쓰이는 키즈카페를 찾아내야 한다.
발달센터에서 아이를 대기하며 아이와 갈 곳, 아이와 할 것을 부지런히 찾아 사람이 혼잡한 시간대를 피해 다녀오곤 하는 엄마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를 위한 시간을 쏟고 있음에도, 하루에 아이 혼자 놀게 하는 시간이 생기면 '방치'라는 말을 쓴다.
생각해보면 상우(비장애 둘째 아들) 친구 엄마들은 그런 말을 거의 쓰지 않는데 왜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비장애 아이들은 혼자 놀 줄 아는 기술을 가졌기 때문이고, 발달장애 아이들은 그 기술이 결여됐기 때문에 보호자의 놀이 개입이 지속적으로 들어가 줘야 하기 때문이다. 상우만 보더라도 혼자서 뭐라도 하고 노는데 상윤이의 경우 침대 커버 속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처음엔 그 조차 '너의 휴식시간 이겠거니' 지켜보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대로 둬도 괜찮은가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번 여름방학은 아이를 방치시키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알차게 하루를 보내겠다.'라고 방학 시작 전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방학 첫 스타트는 다른 지역의 키즈카페에 원정을 가는 것이었다. 동네 운전경력은 화려하나 장거리 초보자인 나는 고민에 빠졌다. '주차는 괜찮을까, 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까.'
육아 때문에 불가항력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는 본디 운전에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도 주차는 재미있지만 주행은 너무 싫다.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돌발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시내버스를 탄 경험이 거의 없는 상윤이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안절부절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지도 앱을 켜고 키즈카페까지 길 찾기를 해보았는데, 집 앞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예전에 '개인별 지원 계획' 서비스를 통해 면담했던 발달장애인지원센터 직원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치료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나중에 지역사회에서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게 앞으로 아이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항상 시간에 쫓겨, 아이가 힘이 들까 봐, 혹은 내가 좀 더 편하고자 그동안 자차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상윤이는 자폐성 장애인으로 시각, 청각적 자극에 예민한 데다 돌발적 상황에 매우 취약하므로 아마 앞으로도 운전을 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상윤이가 혼자 많이 이용하게 될 수단은 무엇일까? 아마도 '버스'이지 않을까?'
어쩌면 운전하기가 싫어서 핑곗거리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당장 휴대폰에 버스 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상윤이에게 말해주었다.
"우리 새로운 키즈카페에 갈 거야. 버스 타고 갈 거야."
집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우리를 안 싣고 가면 어쩌지.' 초조함에 도로 쪽으로 몸을 쑤욱 늘려 얼굴을 빼꼼 내밀면서 버스가 올 때마다 쳐다보았다. 우리가 타려고 하는 버스가 오자 손을 뻗어 크게 흔들며 승차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쳤다. 상윤이는 장애인인데 요금을 내는 것인가 안내는 것인가 그것도 잘 모르겠기에 그냥 '어른 한 명, 아이 한 명이요.' 하고 탑승했다. 나도 버스를 안 타본지가 백만 년이라 이 버스가 제대로 우리를 데려다 줄지 걱정이 되는데 하물며 상윤이는 어떠랴. 공항 가는 버스나 서울 갈 때 시외버스 같은 좌석버스는 몇 번 타본 적이 있지만 시내버스를 타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상윤이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여유가 생겼다. 기분이 좋아 자꾸 손뼉을 쳐서 '엄지 빼꼼 주먹'을 쥐게 했다.
공항버스나 시외버스의 경우 출발지에서 타면 목적지까지 거의 한 번에 가는 반면, 시내버스의 경우에는 정거장간의 거리가 짧아서 조금 가다가 서고, 조금 가다가 서고 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바깥 풍경과 하차 안내 음성에 집중해야 하는 차이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상윤이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안절부절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리며 긴장했다. 약 20여분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정확히 내렸을 때 상윤이는 환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며 손뼉을 쳤다. 성공의 기쁨이었다. 불안하고 긴장했던 만큼 성공의 기쁨은 더 컸다.
키즈카페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카레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상윤이는 이제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여유도 생겼다.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돌발적으로 계속 손뼉을 치길래 '주먹! 엄지 빼꼼!'을 시켰더니 손뼉 치기를 멈추고 그 자세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잘 앉아 있었다. 집 근처 익숙한 동네가 나타나자 엉덩이가 들썩 거렸다.
집 앞 정류장까지 잘 도착했다. 상윤인 신이 나서 집까지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의 '버스' 경험이 잘 마무리되어 기분이 좋았다. 개인 SNS에 자랑도 많이 하고, 센터에서 만나는 같은 처지의 엄마들에게 '버스 타니 너무 좋다고, 아이랑 꼭 한번 같이 타보라고' 오지랖도 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한동안은 '괜히 버스를 탔나.' 후회를 좀 했다. 이날 이후 상윤이는 틈만 나면 시도 때도 없이 "버스 타고 갈 거야."를 외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운전하기 싫어서 탔던 시내버스 한 번으로 인해 얼떨결에 우리의 '버스 여행'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