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있으면 결혼 25주년입니다.
정말 엊그제 결혼한 것 같은데 은혼식을 앞두고 있으니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를 혼자 연신 내뱉고 있습니다. 내 키보다 훌쩍 커버린 딸을 보면 유수와 같은 세월의 흐름을 알다가도 TV를 보며 신혼 때부터 좋아한 아몬드를 씹고 있는 아내를 보면 '아직 그 정도 시간은 흐른 것 같지 않은데...'하고 스님 염불 외우듯 중얼중얼합니다.
아내와 나는 대학 때부터 만났으니 31년을 함께한 셈입니다. 참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보고 지금껏 무사히 잘 살아온 것 같습니다.
작년 이 맘 때 브런치에 썼던 '결혼은 미친 짓을까?'
https://brunch.co.kr/@yoonteacher/104
KBS 예능 살림남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율희와 최민환 부부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예쁘고 젊은 부부가 알콩 당콜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 마음속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길 바랬습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 부부도 한때는 저린 호시절이 있었지 하며 슬며시 웃기도 했고요. 부부 사이의 일은 당사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지만 아이가 세 명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곱절입니다.
쌩판 모르는 남녀가 25년을 부부의 연을 맺어 살아보니 결혼만큼 예측 불가능한 이벤트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신혼 때의 마음 변치 않고 사랑으로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TV 인간극장에서만 보았음) 사람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이혼한 부부가 처음부터 5년만 살면 내 마음이 변할 테니 그때 이혼해야지 생각하며 결혼한 사람은 없습니다. 제 눈에 콩까지 낀 신혼 때는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부부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가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어떨 때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처럼 사랑스러운 날도 있고, 또또 어떨 때는 사기꾼이나 원수보다도 더 끔찍이 싫은 날도 있고, 또또또 어떨 때는 그냥 스쳐가는 바람처럼 같은 공간에 있으나 남처럼 지내는 날도 있고, 또또또또 어떨 때는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세상 다정다감하여 설레는 감정 없이 지내는 날도 있고, 또또또또또 어떨 때는 쳐다보는 것도 싫어 금방이라도 이혼하고 싶다가도 참고(잊고) 살아보니 좋은 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무인도의 디바'처럼 남녀 한 쌍이 무인도에서만 있다면 사철나무처럼 평생 변함없는 사랑을 하며 살 수도 있겠으나(이것도 아이가 태어난다면 장담 못함),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서 이혼하지 않고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 될 때까지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문제가 없으나 상대방 집안과의 관계 때문에 나빠질 수 있고, 자녀의 양육과 관련해서 힘든 상황에 처할 수도 있고, 가정의 경제난으로 힘들어질 수도 있고, 갑자기 아파서 삶이 고단해질 수도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결혼생활을 단단히 뿌리내리게 하는 힘은 바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은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결혼 초기의 사랑과 10년, 20년 후의 사랑은 그 결이 다릅니다. 신혼 때의 사랑은 잘 마른 장작의 불꽃처럼 뜨겁고 화려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 헤쳐나간 부부의 사랑은 화려하지 않지만 마른 장작이 까만 숯이 되어 여기서 내뿜는 불꽃처럼 오래가고 뜨겁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진정한 사랑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춘 사랑이 있을 때에라야 배우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자녀와 관련된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결혼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만 제가 한 여자와 25년을 함께 살아본 결과 얻은 작은 깨달음입니다.
그나저나 은혼식 선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왜 남자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
대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어 '은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