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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Z 교장 Jan 08. 2024

커피 그 후

커피의 치명적인 유혹

https://brunch.co.kr/@yoonteacher/382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했습니다'의 다음 이야기입니다.  




유혹(誘惑)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끎


아침 6시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티포트에 물을 끓인다. 정확히 2분 후 '뽀글뽀글' 커피포트에서 100˚ 물 끓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첫 번째 유혹의 손길에 빠진다.


에티오피아 게이샤 원두 20g을 커피 그라인더에 넣고 적당한 굵기로 분쇄한다. 드리퍼에 여과지를 올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 여과지를 적신다. 여과지에 분쇄한 원두를 넣고 드립주전자에 들어있는 90˚의 알맞은 물을 붓는다. 집 앞 편의점의 호빵처럼 봉긋 쏟아 오른 원두를 쳐다보며 향긋한 커피 향에 취한다. 이 황홀감을 만끽한 시간은 고작 5분이지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내 사치의 시간이다.


하지만 상상(想像)이다.

나는 지난해 9월부터 커피와의 인연을 끊었다. 물을 끓이는 이유는 공복에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기 위해서다.


아침 8시 10분이면 교장실에 들어간다.

세면대에서 손을 닦는 순간 두 번째 유혹의 손길이 내게 다가온다. 네스카페 커피머신의 전원을 켜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채운다. 스타벅스 콜롬비아 캡슐을 머신 주둥이 넣고 빨간색 버튼이 깜빡거림을 멈출 때 머리 위의 레버를 오른쪽으로 당긴다. '뽁' 소리와 함께 뚫린 캡슐 안으로 뜨거운 물이 들어간다. 그럼 머신 위에 있는 머그컵 안으로 초콜릿보다 진한 커피 향이 쏟아진다. 내 코를 자극하며 행복의 도파민이 발생한다.


이 또한 상상이다.

사무실에 있는 커피머신과 캡슐은 손님 접대용이다.



치명적인 커피는 시도 때도 없이 날 유혹한다.

사무실에 가면 "선생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라고, 맛있는 식사 후에는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할까요?"라고. 커피를 끊은 지 130일 밖에 되지 않은 내게 이런 제안은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혼미하게 하는 악마의 유혹이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耳], 화려한 카페 간판이 마치 나를 향해 오라고 손짓하고[目], 나의 뇌는 커피의 달콤한 맛[口]을 잊지 못하고, 달콤한 커피 향[鼻]은 하루종일 나를 괴롭힌다.


지난 9월에 있었던 일이다.

중간고사 기간에 모처럼 교직원 체육대회를 열었다.


"교장 선생님 시원한 커피 드세요?"

스탠드에 앉아 있는데 어느 선생님이 아메리카노를 만지작만지작하면서 어렵사리 내게 건넨 말이다.


"괜찮습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나는 매우 단호하게 거절했다. 커피를 건넨 선생님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각오가 지나쳐 선생님의 호의를 무시한 것이다. 명백한 실수였고 내 잘못이었다. 정중하게 거절하거나 아니면 일단 커피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실수를 만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런데 이날의 실수는 엉뚱하게도 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커피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일사천리로 퍼져 그 이후 내게 그 누구도 커피를 권하지 않았다.  


커피는 내 일상 전반을 지배한다.






그럼 나는 왜 이런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지금까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을까?

당연히 커피를 마신 것보다 마시지 않은 데서 오는 행복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백약이 무효였던 불면증을 고쳤다


나는 불면증이 너무 심했다. 급기야는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악화됐다. 온갖 방법을 다 써봐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나의 불면증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할 때부터 찾아온 것 같다고 하면서 커피를 끊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삶에서 매우 큰 즐거움을 주는 커피를 어떻게 끊을 수 있냐?"라고 화를 냈다. 그런데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고통이 너무 커서 커피를 끊어봤더니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삼일 째 되는 날부터 침대에 눕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중간에 깨는 날도 있었지만 바로 잠이 들었다. 15년 넘게 불면증 때문에 아침이 상쾌하지 못했고 머리가 아팠으며 피곤했었는데 이제는 맑은 정신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아침이 상쾌하니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업무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여유 있게 대처하였다. 푸석푸석한 얼굴에서 윤기 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색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커피가 불면증의 원인이라면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상이 불면증이 시달릴 것이다. 주변에는 저녁에 커피를 마셔도 잠만 잘 자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커피를 마시면 뇌가 각성이 되는데 몇 시간 동안 이 각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중해서 일을 해야 할 때는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 엄마와 아빠도 커피 못 마셔. 커피 마시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잠을 못 잔데..."

내가 커피를 끊어 불면증을 고쳤다고 하니까 여동생이 한 말이다. 이제 보니 우리 집안은 카페인을 분해하는 유전자가 없었던 것이다.


커피를 끊어 불면증을 고쳤더니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도 건강해졌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1월이나 12월이면 지독한 감기에 걸려 오랜 기간 생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잠을 잘 자니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증가하여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마음도 건강해졌다. 업무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여유가 생겼고 긍정회로가 작동하니 동료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정의 평화가 찾아왔다. 예전에는 불면증으로 신경이 날카로워 작은 일에도 아내와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 그런데 지금은 화를 내지 않고 웃고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커피를 다시 마실 이유가 없다.


오늘은 점심으로 직원들과 순댓국을 먹었다. 당연히 식사 후에 근처 빽다방에 갔다. 물론 나는 커피가 아닌 달콤한 딸기크림라테를 주문했다. 살이 조금 쪄도 괜찮다. 잠만 잘 잘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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