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어디에 머물렀다 이제 왔습니다.
그곳은 외부와 통신이 완전히 차단된 곳이었답니다. 가기 전에는 핸드폰도 인터넷도 안 되는 곳에서 어떻게 지낼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손에 있는 핸드폰까지 없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고 우주에 혼자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느껴졌답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니 금방 적응이 되었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세상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 번째 세상은 공교롭게도 TV 화면 속 세상이었습니다.
저는 평소 TV를 잘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심코 TV를 켰더니 마침 '현역가왕' 프로그램에서 가수 린이 한오백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넋 놓고 애절한 노래를 듣고 있으니 주책맞게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진정되면서 힐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을 보며 힘든 시기를 견뎠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책 속의 세상이었습니다.
바깥에서의 책읽음은 반드시 해야 하는 숙제와 같았습니다. 그러서인지 책장을 덮으면 읽었던 내용들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독서는 온전히 책과 나와의 독자적 만남이었습니다. 책 읽는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글자와 문장 하나하나를 깊이 사색하며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책 한 권을 다 읽지 않았음에도 단 한 줄의 문장만으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투른 작가 지망생의 가장 큰 기쁨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보물 같은 책을 만날 때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은 작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세상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새의 깃털의 움직임이 보였고, 추운 겨울 새끼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어미 고양이의 긴박한 표정도 보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눈으로 소나무가 백발의 노인이 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핸드폰도 인터넷도 안 되는 세상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10인치도 채 되지 않은 작은 스마트폰 세상에 빠져 있을 때에도 자연은 자기 본성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나라는 존재에 대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바깥세상에서는 사고와 행동의 기준을 타인에 두고 나를 거기에 맞췄다면 단절된 이곳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타인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 아빠, 교장으로서의 내가 아닌 단독자로서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끔 디지털 사회를 떠나 작지만 큰 세상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 삶을 참 풍성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