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y 글린트

전철은 금요일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철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나에게서 고기 구워 먹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잠깐 신경이 쓰였다. 팔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고기 냄새보다는 땀 냄새를 걱정하는 게 맞았다. 조금씩 취한 듯한 얼굴이 여기저기 보였다.

자리가 없어서 재우와 반대편 문 쪽으로 가서 붙었다.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속으로 빠져버릴 듯이 몰두하는 사람들. 영혼이라도 바친 걸까. 아무 표정이 없다.

눈을 돌려 재우를 봤다. 재우는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띠고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터치하고 있었다. 얼굴에 생기가 돈다. 마침 재우는 유리창을 등지고 있어서 그의 휴대전화 화면이 나에게 반사되어 보였다. 누군가와 챗을 주고받고 있었다. 여자친구인가? 놀려주려고 고개를 빼서 재우의 휴대전화 화면을 몰래 봤다. 본 적이 있는 대화 내용. 약의 개수와 가격을 알려주고 있었다. 재우는 챗에 열중하느라 내가 보고 있는 것도 몰랐다. 정신없이 채팅창마다 들어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전철이 지상으로 나왔다. 달빛도 보이지 않는 까만 밤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준이 왔니?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셨다.

네.

신발을 벗으며 보니 현관 거울 앞에 신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백화점 구두 상표가 박혀 있다. 어머니는 신발 상자를 들어 나에게 주셨다.

신어봐.

제 거예요?

상자를 열어보았다. 광목 더스트백이 오므려져 있었다. 주름을 풀고 손을 집어넣어 구두를 꺼냈다. 반짝반짝한 검은색 정장 구두였다.

구두? 웬 거예요?

응, 형이. 민준이도 곧 회사 면접 보러 다닐 텐데 필요할 거라면서 사 왔네. 오늘 반차 쓰고 백화점 다녀왔더라.

구두를 봤다. 얄쌍하고 날렵한 디자인의 구두였다. 번쩍거리는 광은 대체 뭘로 냈을까 궁금했다. 더스트백에서 꺼낼 때 만졌던 구두의 뒤꿈치에는 벌써 지문이 묻어있었다. 정갈하게 끈으로 조인 구두의 중앙부가 답답해 보였다. 어머니가 맞나 보게 한번 신어보라고 하셨다.

형의 발에 비해 내 발은 훨씬 넓적했다. 길이로 따지면 270이지만 너비가 모자라 280을 사기도 하고 어떨 땐 290까지 맞는 희한한 발이었다. 온라인으로 신발을 사면 꼭 교환하는 일이 생겼다. 교환하는 것이 귀찮아 그냥 신은 적이 한 번 있다. 신다 보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좁은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었다.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온 그날, 발가락뼈가 협착되는듯한 통증에 두 번 다시 그 운동화는 신지 못했다.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현관에 놓인 가족들의 신발을 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의 신발은 얇고 길쭉했다. 유독 왜 내 발만 이럴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구두에 달린 택에 사이즈 280이라고 적혀 있었다. 맞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한쪽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다. 역시나 폭이 좁았다. 어머니는 끈을 조금 늘리면 맞지 않겠느냐고 하시며 양쪽 다 신은 것을 좀 보자고 하셨다. 마지못해 양쪽을 다 신고 일어섰다. 딱딱한 구두 속에 발을 끼워 맞추면서 혹시나 구두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어머니가 잘 맞는 것 같냐고 물으셨다.

아뇨. 껴요.

어머니는 처음엔 끼겠지만 가죽은 신을수록 늘어난다고 하셨다.

우리 막내가 이제 이런 구두도 신고 멋지네. 조만간 나랑 같이 가서 정장도 한 벌 맞추자.

어머니는 대견하다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셨다.

구두를 신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봤다, 흰색 반 팔 티셔츠에 카키색 카고바지를 입고 있었다. 발에 끼운 구두가 우스꽝스럽고 늙어 보였다. 하나도 멋지지 않았다. 얄쌍하고 날렵한 건 형에게나 어울렸다.

허리를 숙여 구두를 벗을 때 방에서 형이 나왔다. 형이 나를 보며 물었다.

어때?

나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작다고도 크다고도.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없었다.

고마워.

형은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신문을 들고 소파로 갔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형의 얼굴이 안 보였다.

나는 구두를 더스트백 속으로 도로 넣었다. 상자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가만히 닫고 책가방과 신발 상자를 내려놓았다. 내 집 안의 내 방. 익숙한 책상과 침대. 익숙한 내 것들 속에서 또 느끼는 이 낯선 기분. 이방인이 되어 방안을 바라봤다. 내 것인 듯 아닌 듯한 괴괴한 느낌 속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12시 5분.

이제 씻고 자야 한다. 내일은 서연과 바다에 가기로 한 날이다. 휴대전화를 꺼내 서연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한다.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바다에 가자고 한 건 서연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며 이럴 땐 남자친구가 바다도 데리고 가고 하는 거랬다. 2주 전엔 엄마와 싸워서. 한 달 전엔 절친과 절교해서 춘천과 파주에 다녀왔었다. 싸웠던 엄마와 절교했던 절친과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잘 지내고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기분이 안 좋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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