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by 글린트


유리와는 처음부터 말이 잘 통했다. 공부와 세상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나를 유리는 이해했다. 우리는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공부가 그렇게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라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먼저 할 거라고 했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처럼 맹목적이지도 멍청하지도 않아, 아마도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주어질 것이라고도 나는 말했다. 유리는 내 말에 동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을 하기 전부터 이미 동조했다.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할지 유리가 먼저 아는 느낌이었다.


매일 만났다. 밤새도록 통화하는 일도 잦았다. 나는 이제 내 방에 틀어박혀 있던 시간을 잊었다. 학교 앞에서 유리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집으로 데려다주고 가끔씩은 교회도 같이 갔다. 가족도 깊숙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유리가 먼저 읽어주고 격려했다. 그런 유리에게 내가 푹 빠지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이었다. 고3 신분이 주는 무게감은 실재했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등한시하고는 있었다지만 지금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남들을 실컷 비웃으며 마음껏 욕하고 무시했는데 그러느라 나의 분노를 다 써버린 것 같기도 했다.

거실에 달린 새해 달력을 봤다. 1월. 어떤 목표를 세워도 그 해 안에 이뤄낼 가능성이 가장 많은 달이다. 수능까지 1년 정도가 남았으니 그냥 한번 공부해 보면 어떨까. 허세가 아니라 나도 공부를 하면 진짜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나서면 주위 사람들이 놀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놀릴 것도 같았다. 혼자 인강을 듣기 시작했다. 국어, 영어, 사탐과 과탐, 수학 수업을 들었다. 외계어 같았다. 화면 안의 강사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못 알아들었다. 공부에 손을 놓은 지 몇 년이더라.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노트북을 끄고 의자 깊숙이 앉았다.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남들 모르게 해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관둘 생각이었다.


유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농담처럼 살짝 이야기했다.

고3도 됐고 해서 내가 양심상 인강이나 한번 들어볼까 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하하하. 진짜 저런 걸 다른 애들은 그동안 들었다는 거지? 아휴. 그게 뭐야. 나중에 저거 다 까먹을 텐데.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저런 걸 다들 용쓰며 외우고 있는 거잖아. 유리야, 우린 안 하길 다행이다, 그치?

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유리야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아니 그니까. 고3이란 게 사실 별것 아닌데. 내가 왜 갑자기 공부를 해보겠다고 그랬는지 모르겠어. 괜히 인강 듣겠다고 아까운 내 돈만 날리고...

민준아.

어?

네가 먼저 공부 얘기를 해서 말인데. 나 정말 너한테 말하기 힘든데, 그래도... 너랑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으니까 말할게.


유리는 밥보다 빵을 더 좋아했다. 같이 카페에 가면 꼭 케이크나 빵을 시켜서 먹어보고 자기만의 품평하기를 좋아했다. 이 집은 좋은 버터를 써서 향이 참 좋아, 저 집은 크루아상부터 파이까지 똑같은 반죽으로 대충 만드나 봐. 유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탄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말하는지, 나는 유리의 미각에 감탄하며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줄로 알고 먹었다.

향이 좋은 소금 빵을 먹어보라고 주면 그건 정말 향이 좋은 소금 빵이었고 바삭한 질감이 일품이라며 바게트를 건네면 그 바게트는 한국에서 쉽게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바게트였다. 그런 유리가 맛보는 데에만 감각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데이트할 때 가끔 구워오는 쿠키와 구움 과자는 적당히 달콤하고 향긋했다. 굽기 정도도 일정하고 예뻐서 지금 당장 팔아도 되겠다고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유리는 공부를 시작한 지 좀 됐다고 했다. 자신에게는 이제 꿈이 생겼다고, 그 꿈은 민준이 너도 예상했겠지만, 제빵사라고 했다. 빵, 케이크, 쿠키 등등 만들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내가 빵이랑 디저트를 좋아하잖아. 먹는 것만 좋아했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랑 맛있는 가게들 많이 다니면서 그런 마음이 조금씩 쌓였던 것 같아. 그래서 나..

유리는 말끝을 흐렸다. 유리와의 이런 진지한 대화는 처음이었다. 유리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이런 면이 있었나. 왠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그만 울적해졌다.


유리는 출국하기 전날 밤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왔다. 나는 유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내 눈치를 살피다 결국 편지만 주고 돌아갔다. 유리는 가다가 몇 번이고 나를 돌아봤다. 유리가 준 편지를 열어볼 수 없었다. 유리를 만난 이후로 우리 둘이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유리는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철도 없이 생각했었다. 내가 고3이라 인강 들어봤다는 허세 낀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유리와 디저트 먹으러 다니지 않았다면. 그러면 유리가 떠나지 않았으려나? 혹시 나 자신이 문제였을까?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 유리 옆에 있었다면 떠날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까?

괴로웠다. 어떻게 나를 두고 떠날 수가 있지? 호주에 간다고? 왜? 나와 함께한 시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지 따져 묻고 싶었다. 굳이 호주에서 카페를 한다는 이모에게까지 갈 필요가 있냐고, 한국에서 조금만 더 준비하고 가라고 이성적으로 설득했어야 하나. 비굴하지만 유리 앞에서 눈물로 호소라도 해볼 걸 그랬나, 아니면, 나야 베이킹이야 하고 유치하게 고집을 부렸어야 했나... 수백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혹시 내가 유리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지 나는 자꾸 되물었다.


유리는 떠났다.

울다가 잠드는 날, 잠이 안 와 밤새도록 깨어 있는 날이 계속됐다. 처음에는 유리가 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 전화하고 싶고 만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데 대한 무력감이 컸다. 하지만 그 무력감은 곧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제 유리가 미워졌다. 나와 유리는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 혼자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유리야 어디 가. 바다에는 왜 뛰어든 거야. 나는 이제 어떻게 해. 유리는 답이 없었다.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포기했던 나였다. 그런 나와 달리 자기 뜻을 세우고 한걸음 내디딘 유리를 보며 나는 부러움과 조바심을 동시에 느꼈다. 유리에 대한 내 감정이 예상과 다르게 바뀌자 나 또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에게는 변곡점이 필요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노트북을 열어 인강을 듣기 시작했다.


어! 서연아. 여기.

오빠.

우리 집에서 차로 30분을 달려 서연의 집 앞에 왔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서연이 사는 아파트의 문주는 하도 위풍당당해서 나는 늘 오줌이 마려워지곤 했다. 문주만큼이나 아파트 가격 또한 위풍당당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던 서연이 뛰어왔다.


서연은 제대 후에 참석한 과 모임에서 처음 보게 되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얘서 단연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는 유리 이후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고, 만나더라도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커서 관계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서연에게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손끝보다 훨씬 짧은 손톱 주변에 거스러미가 올라와 있었다. 유리도 손톱을 물어뜯고는 했었다. 유리가 손톱을 물어뜯는 것은 약간 불안해 보이는 동작이라면, 서연은 어딘가 모르게 신경질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서연의 손에 자꾸 눈이 갔다. 서연과 나의 눈이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서연은 그것을 호감이라 확신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학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서연이 다가와 내게 밥을 사달라고 했다. 둘이서만 먹고 싶단 말을 덧붙였을 때 함께 있던 친구들이 야유를 보냈다.


서연은 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어 뛸 때마다 검은 머리칼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서연의 머리카락에서는 시원하고 청량한 향이 났다. 어떤 샴푸를 쓰냐고 물었더니 서연은 웃으며 샴푸는 두피에 닿는 거라 향이 없고 성분이 좋은 것으로 쓴다고 했다. 이건 트리트먼트 향인데 두피를 피해 머리카락에만 바른다고도 했다. 스타벅스에서도 저지방우유에 라이트시럽으로 꼬박꼬박 바꿔 주문하는 서연이 할 법한 대답이라 여겼다.


막혀서 이제 왔네. 기다리지 않았지?

응 엄마가 갑자기 케일 주스 갈아서 주셔서 나도 지금 나왔어.

케일... 주스?

오빠도 같이 먹으래. 하며 서연이 가방을 들어 보여줬다. 나는 어머님께 감사하단 말씀 전해드리라고 하면서도 왠지 케일 주스가 들어있는 저 가방이 부담스러웠다. 서연에게 벨트를 매라고 하고 나는 기어를 바꾸어 출발했다.

주말이라 시내를 벗어나는 데도 한참 걸렸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지루한 시간 끝에 고속도로로 나오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음악 볼륨을 높였다. 좋아하는 걸그룹의 노래가 나오자 흥이 올랐다. 대각선 앞에서 달리는 차는 나의 드림 카인 포르셰 카이엔이었다. 세련되고 매끈한 저 녀석을 언젠가는 타고 말리라. 비록 아버지의 차를 몰고 있지만 마치 카이엔을 몰 듯 액셀을 밟아봤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조금 달려볼까 하는데 서연이 볼륨을 줄였다.

근데, 오빠.

응?

오빠는 왜 인스타 안 해?

인스타? 글쎄.

이제 막 신이 나려고 했는데 줄어든 음악 소리와 함께 흥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런 거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어서 싫더라.

인스타 안 하는 사람 내 주변에 오빠랑 서진주밖에 없는 거 알아?

그래? 음. 내가 유행을 못 따라가는 편이기는 하지. 하하.

그게 아니고. 인스타 안 하는 사람은 왠지 소통하기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다들 하더라고. 서진주는 맞지만, 오빠는 아니잖아.


서진주는 같은 과의 여학생이었다. 얼굴은 알고 있었다.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어서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서연은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술자리에서도 걔를 한두 번 본 적이 있어. 술을 안 마시더라? 안 마실 거면 오지 말지 왜 와서 혼자 사이다만 마시고 있는지 난 좀 이해 불가야. 서진주 맨날 술도 안 마시고 안주만 축내는 거 뻔히 알면서 무슨 모임 때마다 오빠들이 끼워주더라고. 우리 과 오빠들이 너무 착하잖아. 우리 진주, 우리 진주하면서 서진주 없으면 무슨 재미로 모이나. 막이래. 아, 나는 뭐 불만은 없어. 걔가 술을 마시든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니까.

서연은 속사포 래퍼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말했다. 말하는 중간중간에 숨을 쉬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근데 저번 주에 조별과제 하느라 며칠 동안 같이 조사하고 PT랑 UCC까지 만들었었어. 힘들게 만들고 나서 고생했다고 조장 오빠가, 그 찬성 오빠 알지? 그 오빠가 다 같이 맥주 한잔하자고 하는 거야. 근데 서진주 걔가 갑자기 자기는 빠지겠다는 거야. 늦은 시간도 아니었고 그 시간에 약속이 있을 리도 없는데 말이야. 아니, 우리는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모이는 건가? 과제도 꽤 잘 나온 것 같으니 격려하는 차원에서 찬성 오빠가 제안한 건데. 같이 좀 으쌰으쌰 하면 어디가 덧나? 서진주 걔가 찬물 끼얹고 나니까 괜히 찬성 오빠도 그냥 다음에 먹자고 하더라고. 서진주 아빠가 목사인 거 얘기했었나?

얘기했었다고 했다. 세 번 이상 얘기했었다고 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서진주가 술자리에 가는 것이 불만인지 가지 않는 것이 불만인지 묻고 싶은 마음도 묻어두었다.

난 솔직히 서진주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술을 안 마시는 것 같지는 않아. 술을 안 마신다, 술자리에 안 간다고 하면 일단 어때? 이목을 끌잖아. 왠지 더 궁금해하고 관심 갖게 되는 그런 거 있잖아 왜. 걔는 그런 관심을 노리는 거야. 내 친구들 중에서 교회 다니는 애가 없겠어? 근데 걔네는 다 술 마셔. 술만 마시나 뭐? 담배도 피우고 더한 것도 해.

서연은 내가 SNS를 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서진주의 험담으로 차 안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운전할 때 조수석에서 코를 고는 것보다야 물론 낫지만, 서연의 날이 선 말들은 맞장구쳐 주기가 점점 더 버거워졌다.


서연아, 케일? 케일 주스 마실까? 목마르지 않아?

아, 주스 마시고 싶어? 알았어. 꺼내줄게, 잠깐.

서연의 관심이 잠시 케일 주스로 옮겨가고 나는 숨통이 조금 트였다. 차는 어느새 강화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우와! 너무 예뻐!

서연은 휴대전화 카메라로 식탁 위의 모둠회를 찍기 시작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인지 각종 해산물과 반찬이 정말 그럴싸해 보였다.

오빠, 잠깐 옆으로.

서연은 SNS에 자신의 얼굴은 물론 다른 사람의 얼굴도 일절 나오지 않도록 주의했다. 딥페이크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각별히 조심하는 거라고 했다.

오빠, 이 집에서 가장 유명한 게 이 모둠회인 것 맞지?

응. 후기가 괜찮더라. 사진에 잘 나와?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아까부터 배가 고픈 상태였다. 서연이 핀잔을 주지만 않았어도 오는 길에 보이던 만둣집에서 이미 일 인분을 먹어치웠을 것이다.

그러게. 케일 주스를 마셨어야지.


차에서 서연에게 케일 주스를 마시자고 했을 때 서연이 꺼내 든 케일 주스의 색깔이 심상치 않았다.

‘저렇게까지 초록색이라고?’

나는 서연이 준 케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서 입 밖으로 뿜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것은 정말 케일 주스였다. 보통 케일 주스에는 사과나 바나나 뭐 그런 것을 같이 넣고 갈지 않나? 서연의 어머니는 오직 케일만을 넣은 주스를 만드셨던 것이다. 우리 엄만 단맛을 경계해서 집에 설탕도 없다던 서연의 말이 생각났다.

맛에 너무 놀라서 도로 뱉고 싶었는데 서연이 보고 있어서 뱉을 수도 없었다. 간신히 삼키고 그것이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케일이 눈에 좋다더니 정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한 모금만 마시고 더 이상 마시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서연은 천연덕스럽게 케일 주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이 아깝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혀 전부 마신 서연은 나를 바라봤다. 나는 혹시 서연의 엄마가 내 주스만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닌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했다.


맛이 없어?

서연이 물었다.

아아니. 맛이 없다니. 어머님이 생각해서 주신 건데. 운전 중에 마시면 혹시 위험할까 봐 그렇지. 하하하. 서연이 네 거랑 내 거 같은 주스인 건 맞지? 하하하. 도착해서 마실게.

내 농담에 서연은 웃지 않았다. 결국, 도착해서도 나는 그 주스를 마실 수가 없었다.


서연은 이제 SNS에 올릴 사진을 모두 찍었으니 먹어도 된다고 했다. 이미 인스타에 사진과 함께 ‘바다 보며 힐링 중’, ‘남친 덕에 해피해피’ 같은 문구를 써서 올린 후였다. 큼지막하게 썬 우럭과 도다리, 밀치, 돔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서울에서 먹으면 이거보다 훨씬 비쌀 거라며 서연이 바다에 오길 잘했다고 했다. 자기 기분 풀어주려고 이렇게 선뜻 바다에 데려오는 남친이 얼마나 있겠냐며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잔잔한 파도가 사르르 와르르 쉬지 않고 쳤다. 그것을 보며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니 나도 덩달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술을 몇 잔 마신 서연이 나에게도 한잔하라고 권했다. 대리 불러서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며 내 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강화도에서 서연의 집까지, 서연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의 대리비가 횟값만큼 나올 것이다. 이미 서연을 위해 이곳저곳 다니느라 모아둔 용돈도 거의 다 써버린 상태였다.

오늘은 별로 안 당겨. 다음에 같이 마시자.

나는 술 대신 돔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어? 여기 어디 빵집이 있나 봐. 빵 냄새 너무 좋다.

서연은 코를 킁킁거렸다.

진짜 어디선가 빵 냄새가 풍겨왔다.

오빠, 나 배부른데도 빵 냄새가 나니까 빵도 먹고 싶어. 오빠가 맛있는 것 사줬으니까 내가 빵 사줄게. 가보자.

내가 계산하는 사이 서연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서연은 계단을 내려가 빵집이 어디 있는지 찾아다녔다. 저깄 다! 하며 서연이 앞서 걸었다.


서연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갔다. 그때 빵을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하며 나를 웃겼던 유리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 총총거리는 걸음걸이와 함께 내 손을 잡아 이끌던 유리의 거스러미 난 손의 감촉이 떠올랐다. 빵 냄새만 나도 유리가 생각나서 기분이 가라앉던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어떤 기억은 머리가 아닌 코나 손에 새겨져 있다.

서연이 가게 안에서 나를 불렀다. 뒤늦게 빵집에 들어갔다. 서연은 이미 신이 나서 쟁반에 종이를 까는 동시에 진열된 빵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서연은 몽블랑, 까눌레, 올리브 치아바타. 통곡물 사워도우 등을 차례로 담으며 빵집 안을 걸어 다녔다.

뭐가 맛있어 보이냐며 빵에 대해 설명하던 유리. 내가 소시지 빵이나 찹쌀 도넛을 고르면 어머, 민준 할아버지는 이런 거 좋아해요? 하며 놀리던 유리가 생각났다.

나에게 묻지 않고 서연은 혼자 빵을 골라 계산했다. 서연은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나는. 나는 서연을 좋아하고 있을까? 서연과 유리를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건 서연에게 불공평한 처사였다.


계산을 마치고 서연이 빵 봉지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해시태그 강화도맛집, 강화도빵집, 강화도 가볼 만한 곳 따위를 입력했다. 비싸고 예뻐 보이는 빵들이었다. 그중에 하나를 꺼내면서 내가

이거 사워도우로 만들었네. 했다

서연은

샤워도? 그게 뭐야?

아니, 사우어 도우. 신맛이 나는 반죽이라 그렇게 불러.

아아 그렇구나. 어쩐지 냄새가 약간 내 취향이 아니더라니. 큭크. 특이해서 그냥 사 봤어. 오빠 빵에 대해서 잘 아네?

아, 아냐. 내가 잘 아는 건 아니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연은 잠이 들었다. 빵을 집으로 가져가면 엄마가 분명 먹지 말라고 할 것 같다고 했다. 차 안에서 맛만 봐야겠다고 하며 빵을 먹던 서연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그대로 잠이 든 것이다.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빵을 봉지째 들어 쇼핑백으로 옮겼다. 서연이 우물우물 잠꼬대를 했다

맛있어.


서연의 엄마는 좋게 말하면 집밥 전도사였고 나쁘게 말하면 건강 염려증 환자였다. 집에서는 단맛, 짠맛, 매운맛이 극도로 절제된 식단만이 허용됐다. 서연의 얼굴이 조금만 부어도 엄마는 혹시 어제 바깥에서 뭘 사 먹었는지를 물었고, 그럴 때마다 서연은 죄책감을 가지고 사 먹은 음식 리스트를 고백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자기도 모르게 엄마가 보지 않는 곳에서 자극적인 음식을 폭풍 흡입한다고 서연이 말했다.

난 내가 자극적인 맛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었어.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달거나 짜게 먹지 않거든. 근데 고등학교 때 학교 앞 분식점 떡볶이가 정말 예술이었어. 방송에도 몇 번 나오고 연예인들이 사가고 막 그런 집이었어. 그 떡볶이를 먹으면서 내가 단맛도 짠맛도 매운맛도 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완전 신세계였지. 친구들이 여태 떡볶이 맛도 모르고 어떻게 살았냐고 놀리는데 좀 헷갈리더라고. 사실 나는 다른 집도 다 우리처럼 먹는 줄 알았거든. 삶은 브로콜리, 삶은 양배추, 고구마, 토마토 이런 걸 주식으로 먹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니까. 뭐, 우리 엄마가 나를 가스라이팅했다고는 생각 안 해.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좋은 음식으로 건강하게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신 거니까. 그런 음식으로 매 끼니 챙기는 게 또 쉬운 일은 절대 아니지.

매 끼니 챙기는 게 또 쉬운 일은 절대 아니지 하는 그 말은 서연의 생각일까, 서연 엄마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걸까.

근데 내가 이미 그 떡볶이 맛을 알아버린 이상 그전으로는 못 돌아가겠는 거야. 그걸 어떻게 거부해 그 맛있는걸.


서연은 나를 만날 때마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죄책감 속에서도 그런 음식을 찾아 먹어야만 마음이 후련했다. 마라탕, 불 족발, 매운 닭발, 매운 돈가스... 나는 너무 자극적이라 싫어하는 메뉴들이었다.

이런 거 먹는 건 내 작은 오락거리일 뿐이야. 집에서 늘 건강하게 먹으니까 아마 다 상쇄될걸. 오빠 만날 때 빼고는 난 남들보다 건강하게 먹잖아,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서연은 그런 음식을 먹을 때마다 변명했다. 그런 서연이 안쓰러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러 같이 가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사실 불 족발 같은 것은 싫어한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조수석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치우느라 애를 먹었다. 시트의 구석마다 노르스름한 빵 부스러기가 끼어 있었고 바닥은 더 가관이었다. 다른 건 괜찮은데 몽블랑에서 떨어진 패스츄리 부스러기는 끈적거리고 잘 부서져서 치우기가 너무 힘들었다. 차에서 조심해서 먹을 때는 괜찮았는데, 서연이 내릴 때 쇼핑백을 잘못 드는 바람에 빵이 전부 봉지에서 떨어져 나와 차 바닥에 뒹굴었다. 잠에서 덜 깬 서연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서연에게 빵은 집으로 가져가지 않기로 했으니 그냥 두고 얼른 들어가라고 했다. 걸어가는 서연의 손에 케일 주스 통을 들려서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니 늦은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가 내일 약속에 쓰실 차인데 이대로 둘 수가 없었다. 주차장에서 시트와 바닥을 깨끗이 청소했다.


차를 닦는 데에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모두 주무실 시간이라 현관 비밀번호를 조심히 누르고 조용히 들어갔다. 소리에 민감한 형 때문에 현관 도어록은 언제나 무음으로 되어 있었다. 집의 불이 다 꺼져 있는 줄 알았는데 안방의 닫힌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부모님 두 분이 조용히 대화하고 계셨다. 집에 들어온 기척을 내지 않고 그냥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안방을 지나치는데

민준이 아직 안 들어왔어요. 지금 얘기 좀 해요.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렸다.

하아... 글쎄, 이번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무슨 대화를 하시는 거지?'

엿듣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안방 문 앞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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