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민준이한테 너무 잘못한 것 같아요... 다... 전부 다 나 때문이에요.
재우는 숨죽여 울었다. 나에게 약 파는 걸 가르친 일, 같이 호주로 가자고 한 일, 몰래 약을 하려고 말없이 사라졌던 일, 그리고 내가 빌려준 돈으로 다시 약을 샀던 일... 그동안 재우가 해왔던 모든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연락을 받은 유리가 유치장에서 재우를 만나고 있었다.
민준이... 괜찮은 거죠?
경찰의 진압이 마무리된 후, 재우는 곧장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간이 마약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재우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되었다.
괜찮아야 해요... 안 그러면... 정말 나도 못 살 거예요.
재우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저도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여기 잠깐 온 거예요.
유리가 말했다.
민준이는 아직 중환자실에 있다고 연락받았고요. 병원으로 가서... 민준이를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잠시 말이 없던 재우는
정말... 경찰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그 갱단 녀석이 화풀이를 하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진짜 죽이려고 했어요. 약에 취해 있었던 게 아닐까 해요.
그런가요...
유리는 이제 더 이상 약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변하게 하고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 놓이게 한 것은 모두 약 때문이었다. 그게 대체 뭔데 사람이 이 지경으로 망가질까. 유리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런데 경찰이요. 어떻게 거길 왔을까요. 거긴 정확한 주소를 모르면 찾아올 수도 없는 곳인데.
택시기사가요.
택시기사는 유리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픽업했던 장소로 돌아가 내 옆에 있던 동양인 여자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고 싶었던 그는 수소문 끝에 유리를 찾았고, 다행히 나의 위치와 상황을 알려줄 수 있었다. 유리가 조금만 더 늦게 신고했다면 아마 나는 갱단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수술은 8시간이 걸렸다. 중환자실로 옮겨간 후에도 유리는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렸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나는 살살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걷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온몸의 뼈가 조금씩 뒤틀려 삐걱거렸다. 땅에 발을 디디면 발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발가락에서 발등, 발목을 지나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 골반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쭉 뻗어 올라오는 고통이었다. 나는 매일 찾아오는 유리에게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재활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물리치료사가 하라는 대로 정석을 따라 열심히 움직였다. 날 선 고통을 참고, 펴지지 않는 허리를 폈다. 다행히 회복 속도가 빨랐다. 몸 여기저기에 수술 흉터가 남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제 나는 겉보기에는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몸이 많이 회복된 어느 날, 유리가 병원으로 도시락을 들고 왔다. 김밥이었다. 김밥은 나와 유리가 만날 때 자주 사 먹던 음식이었다.
김밥을 싸서 왔어? 그냥 오지, 번거롭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병원 밥이 질리던 나는 김밥이 든 도시락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김밥용 김과 단무지 등은 한인 마트까지 가야 살 수 있었다. 열 가지도 넘는 속 재료가 김밥 안에 꽉 들어차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정성이 들어간 김밥이었다. 한 개만 집어서 먹었는데도 입안이 가득 찼다. 김의 향과 재료들이 정말 조화로웠다. 오랜만에 먹는 한국 음식에 나는 감격하고 있었다. 유리와의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물론이었다.
맛이 괜찮아? 이모가 싸 주셨어.
아 진짜...?
나는 이모가 싸 주셨다는 말에 살짝 당황했다. 당연히 유리가 싸 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김밥을 한 개 더 집어먹었다.
우리 이모가 오늘 너한테 가기 전에 가게로 오라고 하더라고.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나 했는데... 이걸 주시더라. 너 주라면서.
내가 다치고 급하게 수술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리의 이모가 보호자를 자처했다. 이모는 수술비와 병원비 일체를 내주고 간병인까지 붙여주었다. 유리와 가게에서 만났던 날, 유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매몰차게 쫓아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유리의 이모는 치킨 수프가 들어찬 신발을 신고 빗속으로 걸어가던 나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고도 했다.
나는 그동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볼 계제가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로 이르는 심각한 부상에서 이제 막 벗어난 참이었다. 그래도 유리를 통해 유리 이모의 선의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 때문에 오히려 이모의 이야기가 나오면 움찔하게 되었다.
나는 김밥을 묵묵히 먹었다.
너도 좀 먹어.
유리는 딱 한 개만 집어먹고 더 먹지 않았다. 유리는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민준아.
김밥을 어느 정도 먹고 나서 유리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
유리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처음 만나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나와 유리는 끝없이 서로를 잘 안다는 표식을 새겼다. 솔메이트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가 아닐까, 유리보다 나를, 나보다 유리를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생각했었다. 4년. 우리가 떨어져 지낸 시간은 4년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시간에 이런 무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나를 유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
약 때문이 아닌 것 같아서 물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는 나를 정말 잘 아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재우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것. 재우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이제 유리에게 털어놓게 되리라고 직감했다. 유리는... 유리만은 날 이해해 주겠지. 유리를 보자 나는 이제 오히려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졌다. 혼자 끙끙대며 들고 있던 이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도시락의 뚜껑을 덮었다. 유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국으로의 송환 날짜가 일주일 안으로 잡혔다. 관광 비자의 기한은 3개월. 나는 이미 기한을 넘겨서 불법체류자의 신분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한국으로 송환되었겠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마약 사건의 관계인이기도 해서 송환일이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재우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뒤였다. 호주에서 일어난 한국인 관련 마약 사건을 두 나라의 뉴스에서 비중 있게 다뤘다. 비교적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 양국이었지만, 이제 그 어떤 곳도 마약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소개되었다.
마약 검사에서 이미 양성 반응을 보인 재우는 한국의 범죄인 인도요청으로 인해 지난주에 송환됐다. 그에 반해 나는 마약 검사를 통과했다. 최근에 먹은 것이 아니라 소변과 머리카락 모두 깨끗했다. 나 스스로에게 불명예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국으로 멀쩡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거기까지만 생각하자. 나는 비겁해지고 싶었다. 무거운 진실은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하니까. 다만 한 가지, 이대로 한국으로 가면 유리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아렸는데, 유리는 어떨지 몰랐다.
면회가 가능한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창문을 통해 안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가는 눈을 뜨고 보고 있었다. 호주의 햇빛은 한국과는 달랐다. 직접적이고 강렬했다. 호주에 도착했을 때 공항 앞에서 느꼈던 냄새를 기억해 냈다. 처음 맡아보는 청량한 향. 향수로는 절대 재현하지 못할 대자연의 향이었다. 꽃과 풀이 뿜어내는 향기를 강렬한 햇빛이 말려낸, 그것은 사실 해의 향이었다. 그 찬란한 향을 맡으며 며칠간의 여흥만을 기대했던 나와 재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유리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고 나서 나는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에게 털어놓는 것은 이상하게 창피하지도, 망설여지지도 않았다. 입양과 생모, 가정에서 느꼈던 뜻 모를 외로움, 이방인이라는 낯선 감각, 집을 나온 것에 대한 죄송함, 그리고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으리라는 그 다짐까지 모두 말했다. 감정에 대해, 처한 상황에 대해 두서없이 말하면서도 유리가 내 말을 온 마음으로 다 담아내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말을 마치고 유리를 봤다. 유리는 노력하고 있었다. 나의 모든 말을 예전처럼 수용하고 싶어 했다. 이해하고 감싸주고 싶어 했다. 유리가 어떤 마음으로 내 말을 듣고 있는지 나에게 고스란히 다 전달됐다. 하지만 유리는 예상 밖의 말을 했다.
돌아가.
......
돌아가야지.
유리는 다시 한번 말했다.
어디로 돌아가라고.
뜻밖의 말에 내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네가 있던 곳으로.
유리의 표정은 온화하면서도 단호했다.
너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다며. 그게 어딘데. 여기야?
아니었다. 어쩌면 이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유리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는 유리의 옆자리일 수도 있겠다고 애써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런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었다. 유리와는 여기까지라고 무거운 진실이 나를 일깨웠다.
민준아.
......
한국에서 너랑 만날 때. 내가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했던 거 혹시 기억나?
유리의 부모님은 유명 숯불 갈빗집을 운영하셨다. 원래 작은 분식점에서부터 시작해 치킨집과 백반집 등을 차렸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가게에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고 목구멍에 풀칠만 할 수가 없어 부모님은 일당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숯불갈비 식당에 주방보조와 홀 서빙으로 들어갔다. 매일 열 시간씩 일하면서도 유리의 아버지는 어깨너머로 식당의 갈비양념 비법을 배웠다. 이 년 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유리의 아버지가 갈빗집을 열었고, 그 가게는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자그마한 식당에서 금방 큰 평수의 식당으로 옮겨갔고 연예인들이 찾아오고 나서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택배 주문이 몰려왔다. 대성공을 이뤘다. 유리의 집안 사정은 그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유리는 외로운 아이가 되었다.
알잖아, 나 외동인 거.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 같아. 엄마 아빠는 내가 손 안 가는 성숙한 아이라고 하셨지만, 아니야. 성숙한 척했던 거지, 그 나이에 원래 그래선 안 됐는데 의연한 척했어.
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늘 외로웠어. 집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고, 식은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서 나는 왜 태어났을까, 부모님에게는 내가 짐일까 하는 생각을 했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엄마에게 전화해도 엄마는 전화를 잘 안 받았어. 엄마는 언제 이 가게도 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거든. 그래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만 생각했어. 내 전화는 나중에 엄마가 다시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받지 않았대. 하지만 언제나 영업이 끝나는 11시가 되어서야 내 생각이 났지. 그때 이미 난 자고 있었고. 엄마는 그게 날 위하는 거라고 믿었어.
다시는 우리 유리 돈 때문에 못 하는 일 따윈 없게 해 줄게.
유리야, 공부만 열심히 해. 엄마가 다 해줄게.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사다 줄게.
사실, 나는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불행했던 적이 있는지 기억이 안 나. 아무리 돈이 없어도 난 괜찮았거든. 무언가를 사지 못해서, 먹지 못해서 아쉬운 적이 없었어. 그냥 엄마 아빠랑 짧게나마 같이 저녁을 먹던 그 식탁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게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던 것 같아. 난 늘 혼자였던 게 가장 불만이었는데, 엄만 내가 고생을 해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어. 그 어린 나이에 나는 혼자 있는 건 고생이 아닌가? 속으로 생각했었어. 웃기지?
민정은 입만 조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우리 부모님이 싫었어. 이렇게 키울 거면 차라리 낳지 말지. 너무 어린 나이부터 외로움을 가르치려 들다니, 부모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부모님은 형제자매 많은 집에서 지지고 볶고 했다는데, 나한테는 왜 그런 기회조차 안 주는지. 정 능력이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맡기지,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
유리는 내 안색을 살폈다. 유리의 말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민준이 너랑 만났던 그때가 아마도 내가 부모님을 가장 미워했을 때였을 거야. 엄마의 공부만 하라는 말이 어이가 없었던 내게, 민준이 네가 하는 말들은 정말 통쾌했어. 나의 해방구는 너였던 거야. 네가 집에서 느꼈을 낯선 이방인의 느낌을 나도 잘 안다고 생각했어. 우린 마음이 그냥 잘 통하는 정도를 넘어서, 비슷한 아픔을 공유한다고 확신했지.
유리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여전히 따뜻하네.
유리가 옅게 웃으며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숙여 유리의 손을 바라봤다.
내가 호주로 떠나올 때도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딱 너 하나뿐이었어. 오직 너에게만 미안했었어. 내가 호주로 간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 두 분이 놀라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가식적이라고 생각했었어.
‘홀가분해할 거면서 왜 놀라?’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지.
유리는 내 손 위에 얹었던 손을 거뒀다.
호주에 도착하고 이모와 함께 지낸 지 이 주쯤 됐을까? 갑자기 새벽에 전화가 온 거야. 엄마한테서. 엄마는 울고 계셨어. 유리야... 유리야... 그 말 밖에 못 하시면서 한참을 우셨어.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어. 내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미처 몰랐다고. 엄마 아빠는 집에 돌아오면 늘 내가 있었으니까, 정작 본인들은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본 적이 없잖아. 매일 혼자 집으로 돌아왔을 나를 이제야 헤아려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유리의 표정은 침울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할 때의 표정이었다.
물론 그 전화 한 번에 내 마음이 다 풀어진 건 아니야. 나는 여전히 우리 부모님이 왜 그렇게까지 나를 방치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 나를 위해 돈을 버느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일부 맞는 말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아마도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해. 부모님께 내가 1순위였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글쎄... 누군가는 그걸 사랑의 방식이 달라서 그렇다고 하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사랑의 크기가 조금은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은 생각해.
사랑의 크기.
나는 사랑은 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유리는 그 크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사랑의 넓이.
사랑의 길이.
사랑의 높이.
사랑의 깊이.
유리는 사랑의 크기에 대해 한 자 한 자 꾹꾹 짚어가며 말했다.
사랑은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커질 수 있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의 능력을 부여받았고. 그런데 그 능력이 무언가에 가려져 잘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그건 욕심일 수도 있고, 자아일 수도 있어.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면서도 나는 유리가 말하는 것이 무언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근데 있잖아, 민준아. 그때의 너는 미성숙하고 불안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어. 네가 느꼈던 감정이 외로움이었다고 네가 말한다면 글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봤던 너의 모습은 그것과는 조금 달라. 너는 부모님께 분명 사랑받는 아들이었어. 그것도 흘러넘치게. 그걸 간과하지 말았으면 해.
유리는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유리의 부드러운 입김이 내 얼굴에 느껴졌다.
너의 자리를 찾는 것. 그건 정말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야. 네 친구 재우. 아니면 나. 그 누구도 너의 자리를 찾는 방편이 될 수는 없어. 너의 생모도 마찬가지야. 그분이 너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다시 시작해.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 민준아.
유리의 돌아가라는 말은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도록 아닌 척 괜찮은 척하고 있었던 것뿐, 이제 연극은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염치가 없었다. 무슨 낯으로 부모님을 만난단 말인가. 부모님에게 상처를 드린 것도 모자라 이렇게 망가진 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생모처럼 나도 뻔뻔한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멀리서 유리가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나를 발견하고 싱긋 웃는 그녀였다. 나는 햇살과 함께 오는 유리를 눈에 가득 담았다.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나는 유리를 향해 애써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