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올해의 크리스마스가 와버렸다. 다른 날과 똑같은 날처럼 조용히 지나가길 원했는데 12월이 되기도 전부터 모두가 이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길거리에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소품들이 하나 둘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연말에는 시간이 다른 날보다 빠르게 지나가는지 12월 25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오늘만큼은 절대 밖에 나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이불을 끌어와 얼굴까지 전부 덮어버렸다. 모든 시야와 소리를 차단하고 싶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창밖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우진은 매년 이맘때쯤 이 동요를 자주 옆에서 부르곤 했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과 웃음소리가 기억 어딘가에서 떠올랐다.
“보고 싶다.”
작년 크리스마스, 우진은 해리에게 줄 것이 있다며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전화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온 세상은 하얗게 눈이 가득 쌓여있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많은 이들이 설렘을 가득 품은 채 거리를 가득 채웠다. 순간이었다. 길 한가운데에서 미끄러진 아이를 발견하지 못한 차가 그대로 돌진했다. 평소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우진은 그날 역시 아이를 구하려다 그만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지만 우진은 해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떠나갔다. 그날부터 해리에겐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특히 그토록 기대했던 크리스마스는 가장 처절한 날이 되었다.
“추워.”
그날을 생각할수록 끊어낼 수 없는 무력감에 몸을 더 웅크렸다.
톡, 톡, 톡.
톡, 톡, 톡.
우울함에 점점 잠식되어 갈 때쯤 자꾸만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에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소리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톡, 톡, 톡.
처음에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단순히 물이 떨어지는 소리라기엔 더 단단한 소리였다.
“창문 쪽인가?”
톡, 톡, 톡.
가까워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소리를 따라 창문을 열고 주위를 차근차근 살펴봤다.
“저게 뭐… 야?”
잘못 본 건 가 싶어 눈을 비비고 그 자리에 멈춘 채 목만 쭉 빼고 다시 살펴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해리님. 드디어 문을 열어주시는군요!”
“꺄아아아.”
웬 벌레 같은 게 창틀에 서서 말까지 하니 등 뒤부터 귀까지 소름이 돋았다.
“해… 해리님. 진정하세요. 저는 산타마을에서 온 루라고 합니다.”
“산타… 마을? 이거 몰래카메라인가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움직이는 거지?”
해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리며 확인하고는 손을 뻗어 루의 모자를 살짝 건드렸다. 루는 해리의 손길에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아이코.”
“어머. 죄송해요.”
루가 그렇게 가볍게 넘어질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얼른 사과의 말을 전했다.
“괜찮습니다. 해리님 정도면 아주 침착한 반응이거든요.”
루는 씩씩하게 일어나 해맑게 웃으며 옷을 털었다. 조그마한 몸으로 알차게도 움직이는 루의 모습을 보니 이제야 신기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제대로 인사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산타마을 요정, 루라고 해요. 해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를요? 요정님이 저를 왜 만나러 오셨을까요. 여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야 할 어린이도 없고…. 제가 아닌 다른 해리 어린이가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혹시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면 조금 곤란할 수가 있어서….”
“어어. 네. 들어오세요.”
혹시 아까 침대 속에서 그대로 잠들었는데 자각하지 못하고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멍하니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야.”
“꿈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꿈이 아니라서 안심해야 하는 게 맞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예의 바른 이 요정은 날개를 팔랑거리더니 발에 묻어있는 눈을 탈탈 털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그… 혹시 따뜻한 차라도 드릴까요?”
“와! 정말요? 해리님은 정말 친절한 인간이시군요!”
평소 달달한 것을 좋아했던 우진이 자주 마시던 코코아가 생각나 그저 형식상으로 물어본 거였는데 방방 뛰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안 물어봤으면 아쉬울 뻔했다. 물을 끓이고 코코아 가루를 꺼내는 동안 루는 식탁 위에 메고 있던 가방을 한쪽에 두고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요.”
너무 뜨겁지 않게 끓인 물을 코코아 가루가 들어있는 잔에 붓고 루와 비슷한 크기의 미니마시멜로까지 넣어준 뒤 티스푼과 함께 내주었다.
“이…렇게 드리면 마시기 괜찮을까요?”
“네. 완벽해요!”
“제가 요정의 온도는 잘 몰라서 혹시 뜨거울 수 있으니 조심히 마셔요.”
“감사합니다, 해리님.”
루는 티스푼을 들고 코코아를 아주 조금 뜨고는 후후 불어서 한 모금 마셨다.
“우와와.”
꽤 맘에 들었는지 잔뜩 행복한 표정으로 루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맛있어요?”
“네! 제 인생 최고의 코코아예요.”
“영광이네요.”
신나게 코코아를 마시는 루를 바라보고 있으니 우울감에 잠식되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루는 입주위에 까만 자국을 남긴 채로 바닥을 싹싹 비우고는 털썩 주저앉아 배를 통통 두드렸다.
“덕분에 잘 마셨습니다, 해리님.”
“자 그럼 이제 왜 여길 왔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요정님?”
“아! 맞다.”
해리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본분을 깨달았는지 헐레벌떡 일어나 가방을 한참 동안 뒤적거렸다.
“이쯤 있을 텐데. 흠…. 잡았다!”
조그마한 가방 속이 크면 얼마나 크려나 싶었는데 나오는 물건은 그것보다 훨씬 커다란 선물상자였다.
“어떻게 거기서 이게 나오지…?”
“요정의 가방에는 비밀의 공간이 있답니다.”
놀란 모습에 루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해리님, 이거 받으세요. 우진님께서 꼭꼭 안전배송 해달라고 어찌나 절 귀찮게 하시던지.”
낯선 존재에게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루는 다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제 몸에 5배는 되어 보이는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여기 편지도 꼭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전달받은 편지봉투에는 ‘사랑하는 해리에게’라는 말만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해리는 그리웠던 그 글씨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준비 없이 다가온 우진의 흔적에 그동안 꾹꾹 누르고 있었던 감정이 그만 와르르 무너져 내려 들고 있던 편지봉투를 그대로 얼굴에 묻은 채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해… 해리님 울지 마세요. 그럼 저도 슬퍼진다고요.”
루는 안절부절 못 한 채 날아와 그 작은 몸으로 해리의 어깨를 가득 안은 채 토닥였다.
“분명 우진님께서 이걸 전달해 주면 기뻐하실 거라 했는데.”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감정에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울음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루는 여전히 해리를 토닥이면서 그녀가 그렇게나 알고 싶어 했지만 알 수 없었던 우진의 모습에 대해 주절주절 말하기 시작했다.
“우진님은 저번 크리스마스에 처음 만났어요. 어린이를 구한 영웅으로 산타마을에 오시게 되었는데 장난이 좀 많으시긴 하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모두가 우진님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매번 해리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분명 웃고 있지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요. 저는 우진님이 매일같이 말씀하시는 해리님이 너무나 궁금했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크리스마스에 제가 인간 마을에 오게 되면서 우진님께 부탁을 받고 해리님을 만나러 오게 된 거예요. 저번에 주지 못했던 선물을 꼭 주고 싶다면서 해리님이 받으시면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우진님께 또 당한 거 같네요. 평소에 장난을 그렇게 좋아하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들려주는 이야기에 조금씩 감정을 추스르다 루의 장난스러운 투정에 결국 풋 하고 웃어버렸다.
“해리님, 눈물이 멈추었네요! 야호!”
루는 가볍게 날갯짓을 하고는 해리의 볼을 꼭 안아주었다. 해리는 그런 루를 같이 안아주듯 손으로 살짝 감쌌다.
“요정님,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기뻐요. 이번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기쁘다니 다행이에요. 선물을 받고 기뻐해준다면 그게 요정의 행복이거든요.”
“그리고 위로도 고마워요. 루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루는 해리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우진님께서 항상 해리님이 잘 지내시고 있는지 걱정을 해요. 우진님은 저희와 잘 지내고 있으니 해리님도 더 이상 슬퍼하지 마시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네. 그럴게요.”
“이제 저는 크리스마스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 봐야 해요.”
잠깐이었지만 정이 들었는지 루를 보내기가 아쉬웠다. 떠나려는 루의 옷자락을 조심히 잡고는 물었다.
“또… 만나긴 어렵겠죠?”
“저를 만난 기억을 잊지 않으신다면 다음 크리스마스에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꼭 기억할게요. 덕분에 올해 크리스마스에 최고의 선물을 받았어요.”
“다음 크리스마스엔 행복하게 기다려줘요.”
루의 반짝이는 눈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