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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념하다

250310 프리라이팅

제시어 : 잔상(殘像)

by 유념

칫솔도 슬리퍼도 수저세트도 아직 두 개인데 주인은 하나가 되었다. 공허하게 앉아 그동안 했던 말들을 곱씹어본다. 어쩐지 다정했던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이렇게 말라갔던 게. 익숙함이라는 장점이자 단점은 서로를 조금씩 갉아먹어갔을지도 모른다. 상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탓에 대화는 점차 줄어들었고 가끔은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포기했던 것들도 있다. 물론 너도 그랬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 결국엔 독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예상된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무대 위에서 철저하게 연기를 했던 것이다. 그게 진짜라는 착각 속에서. 그래, 이건 해피엔딩인 줄 알았던 새드엔딩이었다. 믿었던 작가에게서 철저하게 배신당한 기분이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왜 처음에는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었던 걸까. 처음부터 없었던 기대였다면 엔딩 또한 기대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대로 몸을 뒤로 넘겨 털썩 눕는다. 천장을 바라본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이대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그리고 눈을 뜨면 예전처럼 네가 있겠지. 정말... 눈을 뜨면 네가 있을까? 눈을 뜰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렇게 네가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보이지 않은 채로 손을 뻗어본다. 그저 차가운 공기만 손끝에 느껴진다. 이렇게 라면 덜 무섭잖아.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찬찬히 눈을 뜬다. 여전히 너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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