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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Dec 02. 2022

전의와 현타, 그 환장의 콜라보

내가 와드를 조지는 건지, 와드가 나를 조지는 건지

 크로스핏에서 내가 유독 못하는 동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월볼샷*이다. 이름 그대로 벽에 무거운 공을 던지는 동작이다. 공으로 하는 모든 운동에 약한 나는 일관성 있게 월볼샷에도 약했다. 잘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비슷하지만, 못하는 사람들의 자세의 다양성은 무궁무진하다. 나에게 월볼샷은 매번 생소했고, 자세는 어찌나 다양한지 코치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니 월볼샷은 한참 동안 내 근력에 비해 가볍게 자세 연습만 하다가 겨우 내 무게를 찾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월볼샷(Wallballshot): 스쾃 자세로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메디신볼*을 높이 던져 타깃을 맞추고 다시 받는 것을 반복하는 것

*메디신볼(Medicine Ball): 무게가 다양하고 탄성이 낮은 운동용 공


월볼샷(Wallballshot)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어가던 그날, 그날의 와드에는 내가 가장 못하는 월볼샷이 있었다. 월볼샷 20개와 스내치* 20개를 총 세 번 반복해서 얼마 만에 끝내는지 측정하는 For Time 형식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와드지만 월볼샷과 스내치는 둘 다 비슷한 근육을 사용한다. 스쾃 자세로 앉았다가 팔을 뻗어 공을 던지는 월볼샷, 하체와 몸통의 반동을 이용해 바벨을 위로 띄우고 어깨와 팔의 도움으로 머리 위까지 올리는 스내치. 쉽게 말해  60개의 월볼샷과 60개의 스내치면 팔다리 근육을 모두 탈탈 털어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스내치(Snatch): 역도의 인상.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


 게다가 그날은 전날 늦게 잠든 탓에 정신도 몽롱한 상태로 점심시간에 운동을 갔다. 웬일인지 그날따라 다른 회원들도 없어서 남편과 나 둘이서만 수업을 들었다. 8파운드의 메디신볼과 35파운드의 바벨로 스내치 연습을 진행했다. 평소와 같은 무게였기에 한 두 개 연습할 때는 큰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별생각 없이 시작한 본 와드에서 그날은 정말 이상했다. 1라운드가 끝나갈 때쯤 처음으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라운드에 진입하자 호흡이 가빠지더니 과호흡이 왔다. 숨이 쉬어지질 않자 덜컥 겁이 났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코치가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코칭하기 시작했다. 호흡은 길게 뱉고 하나씩 꾸준히 동작을 해보라고 다독였다. 이런 독한 사람 같으니. 역시 크로스핏 코치에게는 파이팅만 있을 뿐 포기는 없었다. 호흡이 돌아온 나는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 쉬는 시간이 많아졌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남편은 이미 한참 전에 와드를 끝내고 쉬고 있었다. 나도 얼른 끝내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팔다리도 호흡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3라운드를 끝냈다. 기록은 남편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다. 아무리 남편 체력이 더 좋다지만 평소보다 너무 큰 차이였다.


스내치(Snatch)


 와드가 끝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시무룩해진 나는 박스 한구석에 쓰러진 채 쪼그라들었다. 목에서는 학창 시절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를 할 때 맛봤던 피 맛이 났다. 박스에서 한참을 쉬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크로스핏을 시작하고 온갖 근육통에 시달리고 몸 이곳저곳에 멍이 들기도 했지만 그날처럼 과호흡이 왔던 적은 없었다. 갑자기 체력이 떨어진 걸까?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던 탓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갑자기 현타가 밀어닥쳤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나이에 이 고생을 하나. 운동선수할 것도 아니고 이렇게 힘들게까지 운동을 해야 하나. 평소보다 일찍 찾아온 근육통에 기분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날의 밤 11시경, 우리 박스의 온라인 카페에는 오늘 최종 기록과 내일의 와드가 올라온다. 과연 내일은 어떤 와드가 나를 조져 놓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푹푹 쉬며 카페에 들어갔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내가 비록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와드를 Scaled*로 수행한 여자 중에서는 가장 많은 무게를 들었던 것이다. 나와 실력이 비슷하거나 잘하는 사람들이 평소 연습했던 것보다 조금 무게를 낮춰 스내치를 한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쉽지 않은 와드라는 것을 두 달 차 초보는 알지 못했다.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게 아니었다. 그저 무게가 무거웠던 것이다. 코치가 남들보다 무게를 무겁게 설정해줬다는 것은 내 자세도 근력도 좋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내가 월볼샷에 유독 약하기 때문에 코치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했던 것 같다.

*Scaled: 와드를 정해진 무게 그대로 수행하면 Rx'd, 그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경우 무게나 횟수, 동작을 수정하여 운동하는데 이를 Scaled라고 한다.


 크로스핏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현타와 전의가 왔다 갔다 한다. 내가 와드를 조지는 건지, 와드가 나를 조지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가끔은 이게 웬 당근에 되팔지도 못할 고생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있는 게 느껴지면 갑자기 전의가 불끈 솟아오른다. 안되던 동작을 성공했을 때, 무거웠던 물건이 가볍게 느껴질 때, 하다못해 출근길의 뜀박질이 가벼워졌을 때 조금 더 나아진 나를 느끼면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그러면 또 박스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단 하루지만 초보 중에 가장 잘한 초보에 등극한 그날의 나는 어느새 현타가 사라지고 다시 전의에 불타올랐다.


'좋았어! 내일은 어떤 와드를 조져줄까? 내일의 와드는 오늘에 비하면 껌이군. 내일도 도전! 조지 조지! 와드 조지!'


그렇게 조련당하는지도 모르고 또 전의를 불태우는 초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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