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
영화 ‘가버나움’에서 주인공 자인이 가출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부모가 여동생 사하르를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시켰기 때문이었다. 사하르가 초경을 하게 되자 자인은 부모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고 애쓴다. 설마.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어려 보인다고 쳐도, 사하르는 열 살 정도로밖에 볼 수 없는 아이였다. 열두 살 자인은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출할 순 없어도 꼼수를 부려가며 음료수를 팔아 푼돈을 챙기기도 하는 아이다. 사하르를 강제로 결혼시키자 자인은 결국 가출을 하게 되고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사하르가 출산 중에 사망을 하자 사하르의 남편을 칼로 찌른 자인은 법정에 서게 되고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로 부모를 법정에 고발한다.
그가 설명하기 위해 ‘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을 상대로 하는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인류는 세계화되고,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분명히 더 풍부한 지식을 갖추었는데도 시대에 뒤처지고 이해할 수 없는 전통을 경외하는 마음을, 이성을 무시하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이라는 아우라는 여성 혐오를 감추고 심지어 범죄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얼마나 편리하게 이용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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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고발한 대목은 영화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일은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레바논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인도와 이란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조혼과 강제결혼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지만 명예살인이나 가정폭력 등 다른 문제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십대의 여자 아이들이 모국에 사는 사촌의 영주권 획득을 위해 자기 부모에 의해 강제로 결혼하게 되고 이를 거부할 경우에 가족들의 손에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했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영주권을 획득한 남성이 신부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영어를 못 하는 데다 별다른 능력도 없는 남성이 사실상 여성에 기생해 살며 가정폭력 등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빈번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나 중동 등에서 같은 여성들의 손에 의해 행해지는 PGM(여성 성기 훼손) 역시 전통이라는 이유로 행해진다. 대다수의 여성이 ‘전통’이라는 명목에 순응하기는 하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에게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난민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당하는 여성에게나 행하는 여성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이건 너무나 가슴 아픈 얘기다.
이런 일에 악습이라는 낱말을 쓰고 싶지도 않다. 습관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치부하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의 여지라도 있는 나를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 할까.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는 할머니 손에 다섯 살에 할례를 당하지 않아도 되고, 일곱 살의 나이에 최근 사별해 낙심해 있는 아버지의 친구와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남성 가족이 허락해야만 외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어도 되고,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되고, 밤 9시에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버스 안에서 집단으로 강간을 당하고 장기 적출이라 해도 될 폭력을 당한 채 길가에 버려져 죽지 않아도 되는 나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그런 짓을 자행한 놈들이 ‘전통’이니 ‘가족의 명예를 위한 것’이니 ‘피해자 잘못’이라는 말을 주워섬기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 나는 운이 좋은 것인가.
단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믿어온 시절도 있었다. 기술이 진화하면서 새로운(새롭다는 말을 여기에 붙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형태의 여성에 대한 성 착취를 목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나와 이슬람 문화권의 나라 어딘가에 갇혀 있는 여성, 우리는 이어져 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도에서 여자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가족 내 잉여구성원 취급을 받는다. 집안 경제에는 전혀 도움 되지 않으면서 음식만 축내는 군식구로 여기는 것이다. 실상, 인도의 막대한 지참금 전통은 딸을 결혼시킬 때 집안이 휘청거릴 정도로 경제적 타격을 주기도 한다. 만약 신부가 충분히 어리다면, 신랑 측에서 돈을 덜 요구한다. 그래서 신부 측 가족으로서는 딸을 빨리 보내버릴수록 좋은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인도의 시골 지역공동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불법이라 하지만,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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