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은 과연 진보했을까?

카트리네 마르샬의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by 오지


유시민은 집안일에 대해 “모든 것을 원위치 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살림에 대해 설명하는 데 경험이 묻어나는 표현으로 꽤 적절해 무릎을 치게 만든다. 해본 사람만 아는 비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에 비해 여러 가지 싫어하는 일, 싫어하는 행동이나 상황, 싫은 사람이 많은 편이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싫어하는 걸 하나만 꼽자면 그게 뭐가 됐든 간에 ‘반복’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중 하나가 ‘쟤는 두 번만 불러도 신경질이야.’였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는 학창시절에도 집에서만큼은 짜증이 많은 아이였다. 엄마가 내 몰입을 깨뜨리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리고 대개 엄마가 나를 부르는 이유는 설거지나 빨래 널기, 엄마가 깜빡하고 못 사온 식재료 사오기 등 자잘한 집안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일이었다.


살림 밑천이라는 첫째 딸이라지만 어느 집안이나 다 그런 건 아닌 모양인지 나는 집안일 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 아빠는 회사일로 바빠서 항상 부재 중. 남동생들은 빈둥대고 나는 학교 일이나 친구 관계로 늘 공사다망한지라 엄마만 부엌에서 동동거렸다.

엄마를 돕고 싶었던 마음도 잠깐 들었던 것도 같다. 남동생들이 어릴 때는 어리니까, 학생일 때는 공부해야 된다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모든 심부름의 칼끝이 나를 향한다는 자각이 들 무렵 그마저도 관뒀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엄마의 말과 행동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부당한 일에 발끈하는 성질이 있는 나는 그대로 관둬버렸다. 엄마의 심부름, 동생들 챙기기, 집안의 자잘한 일들. 늘 밖으로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학교생활을 즐겁게 했다. 학교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나 항상 중심이 되고 평판도 좋았지만 엄마를 돕는 착한 딸의 이미지를 내게서 바랐던 엄마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딸이었다. 그렇게 따져보니 나란 인간의 이중생활은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성장 과정이 이렇다 보니 결혼할 때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다. 라면이나 끓일 줄 알았지 제대로 된 요리 하나 할 줄 몰랐다. 그래도 내심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요리할 줄 모르고 집안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것이 왠지 모르게 남성우월주의에 저항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던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건 나만의 착각이다. 요리를 아예 접근 금지 시킬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만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거였다. 꽉 막힌 사고방식에 저항한다고 하면서 나 역시 경직된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러한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고 비판의 빌미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 내가 사는 혜화역에서 시위가 자주 열린다. 원래 시위가 많이 있는 곳이긴 하지만 여성들만 몇 만 명이 모이는 경우는 10년 이상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로서는 두 팔 벌려 반가워 할 일인데 선뜻 나서지지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남성 참가자는 처음부터 배제한다고 했다. 집회에서 구호로 “문재인, 재기해!”라는 문구가 외쳐진다고 한다. 아들이 탄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은 ‘한남유충’의 엄마라서 참석이 불가능하단다. 물론 어느 구성에나 극우와 극좌는 있다. 여성이라고 다 진보의 가치를 고수한다고 여긴 적은 없고 그런 기대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이 상황에 대처할 시나리오는 아직까지 머릿속에 없다. 그들의 시도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반갑게 생각한다. 이런 일이 내 생애 가능하리라고는 기대해본 적도 없다. 과연 내가 시도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들을 목도하게 되었고 시도 자체가 우리 사회에, 그리고 내게 화두를 던져놓았지만 대놓고 기뻐하지 못했다.


이건, 엄청나게 낯설고 서글프다. 애덤 스미스의 시대로부터 나의 미천했던 저항의 학창시절까지. 그리고 2018년. 무엇이 달라졌고 또 무슨 진보가 행해졌는지. 씁쓸한 의문만 가질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keyword
이전 12화잔인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