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약자들이 희망을 말하는 방법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

by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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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홍승희 작가의 책에서 언니인 홍승은 작가와 함께 성매매를 하기로 하는 부분을 읽다가 마음이 불편해졌던 기억이 있다. 왜일까. 이때만 해도 성매매에 대한 입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성매매를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찬성한다면 합법화에 대한 입장은 어떤가 등등. 누군가는 주장하듯, 개인의 선택이라는 데 방점을 찍으면 못할 일이 없을 텐데, 성매매가 뭐라고 안 되는가. 아마도 홍 작가 자매의 선택도 ‘자기결정권’이라는 데 무게를 둔 선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이 이후 성매매 경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빈약한 상상력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성매매에 덜컥 뛰어들었다가 빚더미만 안고 여기저기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는 이야기. 내가 아는 범위에서 성매매 진입 경로는 그런 것인데 적어도 홍승희 작가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성매매업이 사회에서 갖는 함의가 어떤지 그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당시에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런 데서 온 것 같았다. 이른바 자기결정권의 딜레마.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가난에 치여 성매매를 선택하는 케이스가 90년대 드라마의 막장 설정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책은 탈성매매 수기를 담은 책인데 봄날이라는 활동가이자 작가는 가난과 노동, 성폭력 이후 성매매라는 루트를 겪은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성매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순 없었지만 한 가지 깨달음은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정교하게 오래도록 짜여진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당장에 소리를 지르거나 뛰쳐나오지 못했냐고. 말하는 것은 쉽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고 대처하는 방식도 다르고. 각각의 경우에는 수십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선택지가 존재한다. 가난과 혹독한 노동, 성폭력을 겪은 사람들이 모두 성매매라는 길을 택하지 않듯이 성매매 종사자 중에서는 순전히 본인의 선택에 의해서 그 길을 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남들은 꺼리는 일을 만족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자신이 그만두고 싶을 때 시스템 내에서 개인의 선택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거나 애초에 존재해선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의 성매매 산업은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기보다는 취약한 부분을 노려 착취하는 데 최적화된 시스템이고 성매매 여성 혹은 남성에 기생해 지탱되는 구조다. 그러니 성매매 종사자는 시스템에 피 빨리는 숙주이자 착취의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그들은 원할 때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하며, 이들에게 가해진 사회의 비난이 부당한 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매매를 둘러싼 나의 최초 기억은 윤금이 씨 사건이다. 90년대 초반, 세상물정 모르는 학생에 불과했던 나는, 아무리 모자이크로 가려진 채였다지만, 사건을 서술한 문장만 읽어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경험을 했더랬다. 기지촌 여성들은 달러를 벌어다 주는 산업역군 취급을 받았다가도 한편으로는 양놈들을 상대하는 양공주이자 성병 보균자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웠으리라. 그곳에서의 탈출이란 곧, 미군이 자신의 몸값을 치러 주고 본토로 데려가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언뜻 생각해봐도 판타지에 가까운 소망을 이룬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당시에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었나. 소파 협정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 몫은 항상 가장 약한 고리에서만 잔혹하게 작동하는가. 내게 국가와 사회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강한 분노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다름없었다. 그러니 성매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일은 오래된 분노를 마주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답을 알아내는 것은 그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다.


상황은 그렇지 않을지언정 해답은 결코 복잡하지 않은 데 있다. 조해진 작가의 ‘단순한 진심’에서 복희의 어머니는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었다. 손님 중의 한 명이었을 미군에게서 복희를 얻게 되었고, 어찌어찌 연희라는 여성의 도움으로 출산을 하고 이후 사망하지만 복희와 연희, 또 다른 기지촌 종사자인 여성은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된다. 결국 복희는 입양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지만, 공동체는 느슨하게나마 연희라는 여성이 죽을 때까지 운영되게 된다.

아프고 서글프지만 현실적인 지점은 이 과정에 국가의 개입, 이를테면 우리가 사회의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개입이 없다는 것이다. ‘복희식당’을 운영하던 연희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것도, 연희가 가기 전까지 돌봐주던 기지촌 여성에게 한풀이를 할 기회를 준 것도 뱃속에 생명을 품고 있는 여성이다. 이 여성 역시 생모를 모르는 입양된 여성으로 이 소설 속에서 남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주변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이쯤 되면 가족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현대의 가족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고 약한 자들의 연대에서 출발한 공동체도 얼마든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소설 속의 연희라는 여성이 복희의 엄마와 복희를 돌보았듯이. 연희가 죽을 때 곁을 지킨 것은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던 것처럼.

해답의 첫걸음은 언제나 거기에서 시작한다. 여정은 쉽지 않겠지만 그것만이 희망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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