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봄

오미경의 <몸여인>

by 오지

1.

나의 생년월일시를 바탕으로 사주를 뽑아 보면 나는 수 일간이다. 목ㆍ화ㆍ토ㆍ금ㆍ수의 오행 중 겨울에 해당하며 종교 지도자(달라이 라마 같은)들에게 많다고 한다. 사주팔자 중 일간 말고도 수가 차고 넘친다. 수가 과다한 사주인데 계절로 치면 겨울, 토가 있으나 겨울 토에 해당하는 축토니 말 그대로 음습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사주라고 할 수 있다. 수 일간에게 화가 돈에 해당한다는 데 내가 갖고 있는 여덟 글자 중 화는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목 식신을 타고 나서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니 큰돈은 못 벌어도 굶을 일은 없는 셈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사주가 그러니 일확천금의 꿈같은 건 진즉에 접는 편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

미천한 실력이고 그보다 더 미천한 성품을 가진 내가 주변 사람들의 사주를 보다보면 내게 없는 것(특히 화)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다. 만세력에서 화는 붉은 색으로 표시되는데 어떤 사람은 한두 개가 아니라 네 개 이상이 화인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좋은 사주냐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커먼(수의 색은 검은색으로 표시) 내 사주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사주다. 하지만 화를 많이 가진 사주를 부러워한다. 아무리 세상에 망한 사주는 없다고 해도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많이 가진 사람은 부러운 법이다. 그것이 결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에 다름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나이 먹도록 그런 게 잘 안 된다.



2.

몸이나 건강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몸에 대한 이슈를 떠올리자면 대개 몸매를 떠올리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나 또한 그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키가 작은 편이라 키만 크면 무조건 부러워했고(“살은 빼면 되잖아. 키 작은 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 머리숱이 적은 나는 머리털이 아무리 개털이라도 숱만 많으면(“기술 뒀다 뭐해. 매직하면 되지. 숱 없으면 뭘 해도 태가 안 나”) 감탄사를 날렸다. 언제나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 결핍에만 집중하고, 그것만 욕망하는 이상한 삶이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정형화된 아름다움은 없다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고 해도 그냥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누군가는 다이어트에 목을 매고, 거식증이나 폭식증 같은 식이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은(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예전에는 그런 증상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 걸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새삼스럽게 ‘나이가 드니 그런 것들이 다 소용없더라’ 하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이가 드니 날씬하고 예쁜 것보다 젊음을 욕망하게 된다. 아무리 잘 생기고 예뻤던 사람이라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고, 노화를 받아들이는 게 어떠하냐에 따라 나이듦을 멋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젊어 보이려는 발악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진리에 가깝다고 느끼는 건 나뿐인가.



3.

누군가는 몸을 뜯어 고치고, 깎아내서 전쟁터로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몸이 삶을 관통하는 투쟁 그 자체가 된다. 내가 먹는 것이 내 몸을 만들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몸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또 누군가의 몸은 ‘찬성’되기도 하고 ‘반대’를 부르는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24시간이 주어졌지만 시간의 밀도는 다 같지 않듯이 우리의 몸은 생긴 것도 다 다르고 역할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르고, 아무튼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같아질 것을 요구한다. 태어난 대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따르면서 살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여겨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 올 일을 뻔히 알면서 대중 앞에 나서서 자신의 권리를, 자신을 찾으려 했던 변희수 하사를 언론에서 처음 봤을 때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냥 응원할 수만은 없었다. 그의 앞에 놓인 날들이 생각보다 견딜만한 것이 되기를 마음으로 빌었더랬다. 그리고 연이은 몇 번의 죽음들. 우려가 현실로 되는 상황이 반갑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이번 건은 유난히 힘이 든다. 살아 있을 때 힘을 주는 편지라도 보내줄 것을. 당연히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허망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나와 같은 쪽에 서 있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를 추모하며 쓴 글을 여러 번 접하게 된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 나 뿐만은 아니었구나 확인하는 순간 안도하기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글에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우리는 서로 위로하면서 또 희망을 말해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제주도에 동백이 피었다고 하고, 서울에도 벚꽃이 피는 계절이 왔는데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꽃을 보고 반가운 마음도 금세 수그러든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제 곧 4월인데. 4월은 2014년 이래 가장 견디기 힘든 달이 됐다. 올해는 4월이 되기도 전에 두려움에 압도되고 있다. 잔인한 계절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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