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30.의 나.들.이
어릴 적 엄마는 가끔 짜파게티를 끓여 주었다.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짜장라면은 대단한 별미였다. 달고 짠 맛의 조화라니... 맛의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면을 다 먹고 나면 엄마는 꼭 면을 삶은 물을 먹게 했다. 어린 마음에도 기름이 둥둥 떠 있는 면 삶은 물을 먹기 싫었다. 짜파게티를 먹고 나면 꼭 그렇게 해야 된다고 봉지에 쓰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참고 마셨다. 어렸을 때 하기 싫었던 일 중 하나였다.
면 삶을 물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걸 중학교 때쯤 알았다. 친구 집에서 짜파게티를 먹는데 그 희멀건 물 마시는 과정이 없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분위기나 문화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였지만 조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엄마가 날 속였어. 안 먹어도 되는 거였는데 억지로 먹게 했어.’
당시 엄마를 싫어할 이유를 잔뜩 만들어 놓았던 나는 짜파게티 면수를 먹게 했던 일을 리스트에 올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별다른 이유 없이 부모를 싫어하고 무시하던 시절을 통과했다. 어느 날 국수를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기억 한 덩어리를 만났다. 메밀국수를 삶고 난 물을 주전자에 담아 주는 식당에서였다. 짜파게티 면과 메밀국수는 다르지만 뭐 생각하기에 따라서 같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때 피식 웃음이 나왔던 것 같다. 엄마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같다. 그러면서 면수를 꿀꺽 삼켜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조금 자유로워졌다.
내게 용서란 그런 것이다. 짜파게티 면수를 먹였던 엄마를 조금 이해하게 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용서의 나라」에서처럼 강간한 남자를 용서하는 일 따위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이 책을 쓰기 위해 다분히 작위적인 상황을 연출했다고 믿는 편이 쉬웠다. 평소에도 용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강간 생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이유다.
영화 ‘밀양’에서 자기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남자를 찾아간 전도연이 ‘용서’라는 말을 꺼냈다. 남자는 세상 평온한 표정으로 감옥에서 예수님을 만나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대답했다. 아이를 잃고 절망했던 전도연은 그보다 더한 나락이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는 풍경이다. 썩쏘가 절로 나지만 이 정도 돼야 납득이 간다. 강간 역시 권력을 가진 자가 덜 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 약한 자를 착취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용서를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힘센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토르디스가 여러 해를 거쳐 상처를 회복하는 데 열심이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기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되찾고 어느 정도 권력을 회복했기에 용서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가해자인 톰 역시 (처음엔 그렇지 못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강간’이었음을 인정했다는 점도 다르게 작용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강간 생존자와 가해자 사이에 ‘용서’라는 말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강간 생존자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하다.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가지도 못하고 과거에만 갇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그날 자기가 했던 사소한 일을 탓하고 마음에 죄책감을 심는다.
용서는 칼이다. 아무나 휘두를 수 없고, 자기가 다칠 위험도 있다. 힘이 세거나 기술이 있어야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