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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Aug 04. 2020

아무리 애를 쓰고 말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모든 일은 하찮은 배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오랜만에 친구 집에 놀러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뒤에는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물도 제대로 못 마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운전을 하면서 낱낱이 드러나는 성질머리를 감출 수 있어야 하고, 교통신호를 위반하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눈이 두 쌍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집중된 추궁에 당황한 티를 감추기도 어렵거니와 어설픈 변명은 부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만 불러올 뿐이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그렇다. 부모의 거짓말도 그냥 믿어버리는 나이는 이미 지난 것이다.

어쨌든 운전습관 교정에는 효과 만점이다. 그게 어쩌면 당연한 거라며 군말 없이 애들을 태우고 주차장을 나서면서 좌회전을 하려는 찰나 택시 한 대가 지나가려는 게 보였다. 일단 멈추고. 최대한 배려해 운전한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데 왜인지 택시가 움직이지 않는다. 좁은가. 살짝 후진을 하는데 택시기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워워 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뭘 또 그렇게까지 사양을 하고 그러나. 이쯤 되면 자기감정에 잔뜩 취해 헤롱거리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센서가 위험을 감지하고 삑삑 거리는 소리는 듣지도 못했으니. 내가 들은 건 차체 뒤쪽 어딘가에서 이를 갈 듯 빠드득 하는 소리뿐이었다. 아, 망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택시는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사이드를 올리고 내려서 보면 뭘 하나. 주차장 셔터 내려온 걸 깜빡하고 후진하다가 긁힌 것인데.


갈 길이 바빠 운전은 하고 있으나 영혼은 이미 가출한 지 오래였다.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살짝 스크레치 난 것뿐이라며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엄마가 운전하다 실수했다는 사실 하나로 신바람이 난 자식들은 한껏 업이 되어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을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

괜찮아. 사람 친 것도 아니잖아. 인명사고 안 낸 걸 다행으로 생각해.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다급한 택시기사의 표정이 오버랩 되면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김여사 한 건 했네. 그러니 남자들이 솥뚜껑 운전이나 하라고 하지. 하아. 얼굴로 피가 몰리는 느낌은 쎄하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운전인의 자존심에 스크레치를 낸 것이나 다름없다. 비가 차 천장을 시끄럽게 때리는 소리는 요란할지언정 마음의 목소리와는 달리 내상을 입히지는 않는 법이다.     


아무리 살다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라지만 애를 쓰고 용을 빼도 떨쳐낼 수 없는 목소리도 있다. 자다가 이불 킥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굳이 들쑤셔 가며 마음을 후벼 파는 멘트를 가감 없이 날려주는 나의 또 다른 자아들. 그들 모두가 나라는 걸 알지만 대체 그 독설은 나의 어떤 면에서 나온 것인지. 내 안의 다크한 면이라면 화살은 어째서 나만을 향해 달려 오는 것인지.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의 저자는 조현병을 앓다가 병을 극복하고 심리학을 공부하겠다는 꿈을 이룬 이다. 조현병이 극복이 되는 병인지 처음 알았고, 조현병을 앓았던 사람이 심리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 그렇다는 건 내가 조현병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닌 건 분명하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은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목소리가 들리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갈팡질팡 하다가 선택을 아예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목소리에 이끌려 선택을 한 후 뒤늦게 후회하기도 한다. 우울한 날이 있고, 우울감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능한 날이 있는 것처럼 목소리에 휘둘리는 일상이 의외로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조현병 환자들에게 들리는 목소리가 아무리 자기 안의 어떤 면이 형상화 된 존재라고 해도 자기파괴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위험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꿈에서 만나는 그림자와는 다르다. 그림자는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지 존재의 파괴를 위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조현병을 앓으면서 사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만이 중요하다. 저자의 경우 목소리는 계속 들리지만 목소리의 요구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고 행동에 옮길 수도 있다고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내 몸과 행동반경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현병 환자들만이 아니라 내게도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믿지만, 정말 궁금한 건 조현병 환자와 나를 구분하는 정도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가이다. 그것은 나의 오래된 공포와도 관계된 문제다. 내 몸과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 이는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더해지는 공포이기도 하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두려움. 우리가 이야기 나누기 꺼려하는 두려움 말이다. 말을 할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고 했던가. 적어도 하나는 발견한 것 같다. 우리가 끊임없이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글로 써야 하는 이유 말이다.



* 제목은 델리 스파이스의 노래 ‘차우차우’ 가사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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