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걱정해왔던 일이 터졌다. 금요일 저녁. 퇴근한 남편이 저녁을 먹자마자 급하게 옷을 챙기며 본가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호흡곤란 증세로 갑자기 응급실에 가게 됐고, 입원을 해야 하며, 그러려면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하는데 고령의 시아버지 혼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였다. 올 것이 왔구나.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두 분 다 여든 언저리에 있는 나이시니 언제 아프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긴 하지만 그동안은 그저 건강하게 계셔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집안 어른들의 발병과 그에 따르는 가족들의 간병 노동, 그 속에서 선택권 없이 돌봄 노동에 내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 때로는 분개하고, 함께 억울해하면서 언젠가 내게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가늠해보곤 했었다. 자, 너는 어떤 인간이냐. 그런 질문을 받게 된 기분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입원을 했고, 앞으로 계속 치료가 필요한 병명을 진단 받았다. 문제는 그 과정을 함께 했던 남편이 코로나 검사를 해야 했고, 검사 결과 양성 판정을 받게 돼 남편은 병원에서 어머니를 돌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됐다. 결국 어머니 곁에는 혼자 살며 직장에 다니는 남편의 여동생이 남았다.
며느리인 나는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하는 목록에서 일찌감치 제외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계신 곳이 가깝지 않아 아이들을 돌보면서 왕래할 수 있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실 그 속에는 책임감과 그에 뒤따르는 모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며느리 혹은 딸이 갖게 되는 돌봄 노동의 책임과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인간적으로 좋아함(그렇다. 나는 시어머니를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이혼 안 하는 이유 중 하나다)에도 불구하고 돌봄 노동에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이유를 개인의 인성 문제로 치부해도 될까 하는 마음도 한편으로는 존재했다. 아마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 시어머니가 아니라 시아버지였으면 애초에 책임감이니 죄책감이니 하는 단어는 떠올리지도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을 거라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선택지라는 사실에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해 있어 이런 종류의 어려움은 비단 우리 가정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친정 부모님은 시부모님보다 젊은 편이긴 하지만 머지않아 벌어질 일일 것이고,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친정에서 장녀이고 유일한 딸이니 아이 돌봄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내게 책임이 떨어지게 될 일이기도 했다. 며느리가 둘 있지만 내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일에 당신들이 나서야 한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렇다고 행동에 나서기에 결코 만만한 문제는 아니다.
사실 나는 좀 화가 난다. 이런 일들을 겪는 이가 한둘이 아니고 모든 가정이 각자의 방식으로 직면해 있는 문제인데 개인과 가족 단위에서 알아서 ‘각자도생’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고령사회 진입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던 게 한 20년 전인 것 같은데 그동안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끼면서 화가 난다. 많은 이들이 간병인을 쓰는 것으로 해결을 하지만 ‘돌봄 노동의 외주화’라는 선택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그러니 욕할 때 욕하더라도 나는 이 상황을 갑작스럽게 마주한 사람으로 국면의 전환이나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 첫 걸음은 ‘바운더리 정하기’라고 생각을 해본다. 감정만으로 선택하는 일은 폭망할 가능성이 높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나란 사람의 한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다. 적어도 그걸 알고 덤비면 내가 무너지는 일을 피하거나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일도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어머니가 금요일 저녁에 갑자기 입원하게 되는 바람에 가족의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온가족 전염이라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막내 같은 경우는 백신을 맞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전염에 가장 취약했을 텐데 용케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에게 늘 빚지고 그 빚을 갚으면서 사는 거라는 말을 또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빚지는 걸 두려워하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늘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