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20년 지기 친구를 만났어요
저는 친구가 없어요.
친구는 대부분 저 자신이거든요.
혼자 영화보고 혼자 카페가고 혼자 호캉스도 하고 혼자 기차타는 그런 사람이에요.
무슨 걸그룹 노래 같죠?
나 혼자 밥을 먹고~ 훗훗
하지만 얼굴은 걸그룹이 아니라는 게 함정.
사람을 좋아하지만 깊게 사귀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저는 매우 아싸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도 딱 한 명의 친구가 남아있어요.
늦게 입학한 대학에서 만난 저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같이 늙어가고 있죠.
하는 일도 같고 사는 지역도 비슷하고 취준도 같이 한 친구에요.
인연이라는 것은 이렇게 운명이 좀 도와줘야하는 것 같아요.
어느새 우리는 사십대가 되었죠.
저는 철없는 언니였고 친구는 할 일을 반드시 해야하는 사람이었는데
취준할 때 늘 저를 깨워주고 채찍질해주고 도서관 자리를 맡아줬고
저는 축 늘어져 오늘도 공부를 해야하냐며 울부짖으면 친구는 한심하게 저를 바라보곤 했었어요.
김밥천국에서 같이 라면에 김밥을 먹으면서
취업하면 아주 세상 세련된 도시여자가 되어보기로 도원결의를 하기도 했었어요.
되게 사소한 일로 빈정이 상하기도 했는데
제가 어느날 예쁘다고 생각한 귀걸이를 하고 나타나면
"언니 그거 되게 싸구려 같애."
라고 싹퉁바가지로 이야기해서 손절해버릴까 하는 순간도 있었어요.
또 가끔은 저보다 어리다고 나이 공격을 하기도 했죠. 한참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을 때
"언니는 이제 노산이잖아. 분발해."
라고 해서 분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기도 했거든요.
그래도 늘 만나서 컵라면 먹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도서관에 출몰하는 그녀를 보면 반가웠단 말이죠. 희한하게.
그녀는 소음인의 전형이어서 많이 못 먹는데 둘이 같이 낙지볶음밥을 욕심을 부려 먹다가 돌아오는 길에
"언니 나 배 너무 아파. 배 터져 죽은 사람은 없는 거 맞지?" 라고 해서 저를
배터지게 웃게 해주기도 한 그녀여서 그런가요?
그 친구 결혼식도 갔었는데 한창 모유수유를 하던 때라 그녀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에 젖몸살이 났었어요.
돌아오는 길에는 어깨를 잔뜩 라운드숄더를 하고 끙끙 앓으면서 집에 돌아와 괴로워하며 유축을 하던 것도 생각이 나네요.
그렇게 우리는 늙어갔고 이제는 그녀가
"언니 예전에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하기도 하고
저는
"니가 맨날 깨워줘서 내가 사람구실하고 산다." 라고 하면서
미친애처럼 웃는 그런 사이가 되었네요.
내 기쁨에 온전히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우리도 아직 그런 사이까지는 아니죠.
그래도 거기에 근접하게 가고 있는 중 아닐까 생각은 해봅니다.
약속을 해서 누가 좀 늦어도 그냥 혼자 놀다가 만나서 허파에 바람든 여자들처럼 웃다가 칼같이 일어나 식구들 밥채려주러 가는 우리는 이제 많이 큰 아줌마가 되었나봐요.
이번 주에 저는 그 친구랑 만나서 맛있는 맥주를 마셨습니다.
무슨 쇼핑을 했는지 요즘 어떤 제품이 좋은지 자본주의 괴물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남편 이야기에 몸서리치기도 하고 자식은 내 맘대로 안된다는 한탄도 하고 우리 직장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특히 이제 서로의 몸상태를 걱정하곤 합니다.
"언니 나중에 나랑 등산가려면 심혈관 관리 잘해. 내가 업고 가야 되잖아."
저의 콜레스테롤을 걱정하는 그녀.
"야 녹내장 약 잘 넣어라. 뭐가 보여야 놀지."
하면서 또 낄낄거립니다.
관계의 모습이 제 모습을 드러내려면 시간이 필요한가봐요.
이번 주에 다들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이렇게 이십년지기를 이번 주에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