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되었다는 우리말을 혹시 아시는지.
영어권에는 없는 호칭이면서 최근 K-pop 아이돌 ‘덕질(팬 활동)’ 문화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용어.
그것은 바로 oppa.
엄마 아들이거나 남남끼리에서 나이 어린 여자가 손위 남자를 정답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인 그 오빠.
하지만 나의 사전에서는 내 마음을 박력 있게 노크하고 들어와 심장을 출렁이게 만들면 ‘오빠’이다.

나에게 오빠 역사는 그야말로 유구하다. 정석인 나이 많은 오빠로부터 출발하여 이제 전 세대를 아우르는 박애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친오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십 대 때 오빠앓이를 많이 하다가 이십 대 때 주춤했었다. 이제 나도 어른인가 봐. 설레는 게 없네.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무색하게 삼십 대 이후로 덕질 폭발기를 맞이하고 있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행했던 덕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 덕질은 마치 첫사랑처럼 강렬했다. (매번 첫사랑처럼 느끼기는 하지만 강도가 셌다.)
티브이를 보는데 청소기를 멈추고 서서 그의 눈빛을 봤다. 이걸 흔히들 ‘덕통사고’라 부른다. 그 애틋한 눈빛.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모든 걸 내주겠다는 그 마음. 프러포즈는 또 얼마나 절제되게 하는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꽹과리라도 울리며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합니다앗! 하는 그런 게 아니라) 하아~. 더 이상 묘사하면 안 될 것 같아 살포시 멈춰본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아프냐?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가 아닌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하는 그런 인간적 차원을 넘어선 고귀한 사랑이 거기 있었다. 그래 그 눈빛에 심장이 꿰뚫렸다.
일단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모두 모아 정주행 했다. 시간 날 때마다 밤이고 낮이고. 혼자 얼굴이 붉었다 울었다 입을 틀어막았다가 모든 대사를 외울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방에서 만의 덕질로 멈출 수 없었다.
만날 수 있는 현장에 가보자!
일단 팬카페에 가입했다. 팬카페는 생각보다 엄격했다. 행동도 말도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한 사람을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곳이고 어쨌든 노출되는 곳이기 때문에 새색시처럼 조신하게 굴어야 한다. 소심 쫄보인 나는 늘 눈팅만 하며 존재감없이 지냈다. 스케줄체크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어느 날 나는 거기에서 덕질메이트를 만났다. 마침 비슷한 지역에 살고 나이도 비슷해서 우리는 그가 자주 출몰한다는 장소에서 접선하기로 했다. 직장에 다니고 아이를 키우면서 일탈 아닌 일탈을 하는 기분이라 설레고 긴장됐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
“저 혹시... oo님?”
나는 그녀의 닉(닉네임)을 불렀다.
그녀는 나와 동년배였고 비슷한 시기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하는 일도 비슷했다. 운명 같았다. 친구도 별로 없고 일상에 파묻혀 살던 내게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녀와 스케줄을 같이 맞춰 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수많은 팬들을 ‘새우젓’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래도 좋았다. 그를 빛나게 하는 ‘새우젓’이라면 뭐 어떠랴.
하루는 그 스타의 팬 사인회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그가 광고하는 물건을 사야 했다. 생활비를 조금 아껴 사기는 샀지만 엄청난 물량 공세를 하는 사람들을 이기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덕질메이트와 당첨 소식을 기다리며 설렜다. 당첨은? 그녀만 됐다. 배가 아팠지만 팬 사인회에 그녀와 함께 가서 실물 영접의 소감을 묻고 또 물었다. 아스팔트가 녹을 것 같은 여름이었는데 그녀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또 웃었다. 그때의 기억은 더운 여름이었는데도 청량하다.
또 한 번은 멀리 지방에서 그의 행사가 있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포토존으로 들어오는 그를 기다리기 위해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외국에서 온 팬들도 많았기에 우리의 노력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를 보며 우리는 소녀처럼 기뻐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먼 곳으로 여행 올 생각도 못했을 것 같았다. 그녀와 맥주 한 잔을 함께 하면서 직장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스타 이야기를 했다. 그의 대사를 한 사람이 시작하면 마무리는 상대가 했다. 그것쯤은 우리에게 난이도 최하의 미션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행복했던 것 같다. 다 커버린 여자가 누구랑 그렇게 소녀 같은 이야기를 나눌까. 그때는 늦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달빛이 내린 적요한 낯선 골목길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렇게 그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데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캐릭터의 그가 아닌 실제의 그를 알게 되면서 그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일상의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자꾸 알아채게 되었다. 식지 않을 것 같던 열정이 차차 식어가면서 자꾸 마음이 차분해졌다. 평상심이라는 것은 언제나 찾고 싶은 것이면서도 얼마나 심심한 것인지.
그렇게 차차 덕질메이트 그녀와도 소원해지게 되었다. 내 마음이 식은 후 그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내가 할 말을 찾고 있다고 느꼈다. 그 느낌이 참 슬펐다. 마치 호박마차를 타고 유리구두를 신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과 춤을 추던 신데렐라가 재투성이로 돌아온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녀와의 인연도 끝을 맺게 되었다.
지금도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문득 티브이에서 만날 때면 그때의 기억에 희미하게 웃게 된다. 티브이 속의 내 스타는 여전히 멋있지만 나는 그를 위해서 더 이상 움직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나이를 다 잊고 친구와 순수하게 웃고 떠들었던 열정과 추억은 아직도 기쁨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중년의 첫 번째 덕질을 끝내고 한층 더 나이 많은 중년의 챕터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과연 덕질의 유구한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