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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거울 앞에 선...
참치 대뱃살.

by 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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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에서 ‘윤윤’ 왈. 내일도 그 미지의 x-girl은 또 말간 얼굴로 중년의 내게 물을 것 같다. 너 정말 앞으로 어떻게 살 거니? 풋. 진지함은 넣어둬. 그렇다고 변한다면 내가 아니지. 중년의 현타는 모습만 달리하여 계속 변주 중이다.


아 그날도 저녁 식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나 보다. 보통 본인이 한 밥은 맛이 없다던데 나는 안 그렇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그러다 시작된 아들과의 대화.

“엄마 결혼식 사진 진짜 날씬하더라.”

대사는 스위트한데 어째 얼굴이 빙글빙글 조롱 시동 거는 거 같은데?

“야~ 아빠가 엄마 얼굴 보고 만나자고 했대. 그럴만했지.”


아들의 귀여운 눈이 실눈이 됐다. 아 왜 웃어.. 그랬다. 그때는. 심지어 나도 못 믿겠다. 예뻤거든. 허리가 한 줌이었거든. 하이힐을 신고 뛰어도 가벼워서 발바닥 따윈 아프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기 얼마 전에 말이야 길을 걷는데..”

“아 엄마 그때 모르는 남자가 말 건 거? 그거 나한테 한 번만 더 말하면 백번이야.”

아들은 밥을 싹 먹고 그릇을 개수대에 넣어 두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아..아들? 엄마 말 좀 들어보소. 오늘 백 번 채워보자~”


때는 어언 20년 전. 나는 결혼하기로 한 그 man과 만나기 위해 번잡한 도시를 또각또각 걷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인기척. 갑자기 속도를 높여 대각선 앞으로 오더니 내 얼굴을 봤다. 아 여기서부터는 대화를 직접 옮길 수가 없다. 나보고 나한테.... 아~ 어떡해 꺄악!! ㅁㅇ에 ㄷㄷ 면서 ㅋㅍ 한 잔 하자고. 자기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그래요 안 이상해 보여요. 너무나 정상으로 보여요.) 부끄러워서 초성으로 썼다. 나는 단전에서부터 도덕과 윤리를 끌어올려 거절했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결혼에 골인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의 퉁퉁이가 된 나에게 간혹 자존감 지킴이가 되어주고 있다.


설거지하고 샤워하고 몸에 바르는 크림을 얼굴에도 쓱쓱 바르면서 문득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 많이 늙었나? 그러다 벌떡 일어나 옷장을 열어보게 되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예전 리즈 시절에 입었던 옷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래 한 번 입어보자. 지금도 그때 느낌이 나나 어쩌나.

일단 청바지. 연분홍 하이힐과 매치하면 업업업! 되던 그 청바지. “느아아아!” 고주파 소리를 내어도 청바지는 허벅지 시작 부분에서 탈락!


그럼 커리어우먼 느낌이 나는 펜슬스커트. 아.. 이것은 바다에서 2박 3일 나오지 못한 불어 터진 인어공주. 발바닥이 아파 일어서지 못하는 인어공주다. 탈락!


이번에는 원피스. 조신하고 단정한 아가씨 콘셉트를 추구할 때 입었던 옷. 일단 엉덩이까지는 어떻게 통과했지만 허리부터 목까지 이어진 지퍼는 몸 좌우 끝에 붙어서 쫙 벌어졌다. 손거울로 뒷모습을 보니 우왁! 지구도 들 것 같은 헤라클레스.


그럼 상의라도. 키가 작은 편이기 때문에 상의가 짧은 걸 좋아했다. 그래 허벅지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두툼한 백과사전급 대뱃살이 옷 밑으로 까꿍 했다. 아 이것은 그 도깨비 여주인공과 닮은 그분이 분홍 크롭티를 입었을 때의 느낌이 낭낭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 둥실둥실 허리를 돌리며 거실로 나갔다.

“으헤헤헤”, “낄낄” 하루를 보내고 피곤에 젖어 있던 가족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 그 크롭티는 제 수명을 다했다.


그래서 그 옷들을 이제 의류함에 보내주기로 했었다. 아 정말 예전의 나는 정말로 아니구나 느꼈다.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고 사진 속에서 나는 예쁘게 웃고 있는데 지금의 나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자꾸 잊고 예전의 스타일로 꾸미고 입으려고 할 때가 있다. 물론 사이즈를 늘리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보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조금 우울해졌다. 나이가 40대가 되었다고 그냥 딱 40대가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괜찮은 어른이 왜 잘 없는지도 이해가 될 것 같다. 정신과 육체가 잘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자아가 생겼던 10대부터 지금까지의 내가 마구 뒤섞여서 어떤 내가 나올지 모르겠는 상태가 된 것 같다. 드라마 ‘킬미힐미’를 아시는지. 배우 지성 씨가 열연하던 차가운 도사 남자 차도현의 몸에서 열일곱 살 아이돌덕후 틴트부자 안요나가 나왔다가 폭력적 자아 신세기가 튀어나왔다가 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보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둥절할까. 우리 집 청소년에게 잔소리할 때나 어른들을 만나 일할 때 지금의 나이인 척했다가 혼자 있을 때나 덕질할 때는 어린 내가 튀어나와 내 정신을 혼란케 한다. 보는 사람은 그걸 주책이라고 부르겠지.


아 예전 생각만 하고 신나서 옷을 입어보다가 찬물로 쫙 세수를 한 기분이었다. 티브이에서 보는 늙어 보이는 여자의 나이가 자막에 뜨는데 나보다 많이 어릴 때 그때도 깜짝깜짝 놀란다. 정신 똑똑히 붙잡고 주책 부리지 말아야지 하면서.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예전의 나를 곱게 품에 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지난번과 같은 고민의 연장인걸 보니 어쨌든 지금은 생애 전환기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아 어렵다. 내 나이에 꼭 맞게 주차하기는. 평행주차보다 어려워. 아니 근데 뭐 꼭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해? 어허~ 또 열일곱 살 안요나가 뾰로통해서 나온다.

잠이나 자자. 아침에 더 심해지는 노안. 초점 안 맞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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