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Week 1: 숨 돌리기

by 유녕

9월 9일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9월 8일 오리엔테이션 할 때도 강사진들이 참 사람 냄새 풀풀 난다고 생각했는데, 첫 수업부터 감이 좋다. 물론, 수업보다는 강사님 소개와 수업에 대한 개요를 들었다. 예전 내가 상상한 간호학은 생물 I, II와 같은 과학적인 과목만 막연히 생각했지, 의사소통, 지도력을 키우는 강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고, 간호하는 데에 있어 소통의 중요성이 크니 그럴 만도 하다. 의사소통이 간호사와 환우의 관계에 있어 필수라면, 다음 학기에 진행되는 지도력 강좌는 같이 일하게 될 의료진들과의 협업에서 필요한 덕목을 배울 참이다. 적어도, 그리 들었다. 여기서 숨 좀 돌리고,


10일, 다음 날 이어진 수업은 작년에도 지루해했던 캐나다 간호 역사와 윤리 과목이 첫 시간이었다. 마스크만 썼는데도, 내 맘을 들켰는지, 강사 왈, "나도 지루한 건 너무 유감이야, 하지만, 너 스스로가 이 강의를 좋아할 수 있게 해야 해."이었다. 아... 재밌다 유익하다 흥미롭다 기대된다 라고 최면을 걸어보자. 2시간의 첫 교시가 끝나고 연이어 노인간호학이 이어졌다.


사실, 타대학에서 작년 거의 한 학기를 다닌 셈인데, 버티고 버티다 정신적으로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RN 프로그램을 철회했다. 우리가 아는 간호사는 북미에서 RN(Registered Nurse)이라고 부른다. 보통 4년제 대학을 가서 학위를 받고 국가시험에 합격하면 되는데, 난 굳이 RN이나 LPN이나 큰 뜻이 없었다. 물론, 임금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4년제 대학을 또 다니면서 굳이 간호사가 돼야 할까 하는 열정이 없었던 터에, 내가 사는 도시에 2년제 속성 RN 프로그램이 있는 대학교를 알게 되었다. LPN도 2년인데, 이왕이면 급여가 조금 더 센 RN으로 도전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섣불리 결정을 내렸고...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은... should've, would've, could've... 그때 여차저차 했어야 했는데, 여차저차 할 걸... 하는 마음이다. 왜 '속성'인지 이해하는 데는 한 주에 읽어야 하는 페이지 수가 500쪽이 버금가는 걸 보고 뼈 절이 느꼈다. 하하.


다독이며 다독이며 버티고 싶었지만 결국 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했고,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학교에 프로그램 철회를 신청했고, 연이어 정신과 상담사를 찾아가 6개월간의 상담치료를 받았다. 그거 받고, 2월부터는 불교식 명상과 아쉬탕가를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약처럼 매일 하고 있다. 지금은 어떠냐 묻는다면... LPN으로 재기를 꿈꿀 수 있는 정도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행히 RN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선수과목으로 이미 인체 해부학, 병태생리학 I, 통계학, 보건 미생물학을 배운 상태라 해부학을 처음 공부하는 친구들보다는 마음이 조금 가볍다.


노인 간호학에서 참 멀리도 갔다. 작년 난 이미 실습도 병원에서 3개월을 마친 상태라, 요양 병원이나 대학병원이나 간호사가 해야 하는 일이 같음을 알기에 대학병원에 미련이 없다. 대신 항상 의료진의 손이 부족한 요양 병원에서 일을 할 생각이다. 이상하게 들리려나? 병원 실습을 나간 첫날, 배정받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8시간을 함께 하면서 나의 역할은 침상에서의 목욕(bed bath)을 시켜드리기, 침상 시트 갈기, 일회용 속옷(캐나다에서는 환우의 인권을 존중해 절대 기저귀라는 말을 못 쓰게 되어있다) 교체하기, 의치 닦기, 식사 도우미 되기, 시간마다 자세 바꿔드리기를 였다. 적잖이 충격이 왔던 첫날이라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캐나다 간호사는... 다 하는구나... 이튿날부터는 대소변이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되는 '적응의 동물'이 다행히 되어 있었다. 부디 독자분께선 식사 중이시지 않으시기를... 난 비위가 참 좋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게 또 이렇게 쓰이는구나. 하하하.


작년에 현타가 온 후로, 이번에는 일주일에 하루는 책에 손을 대지 않는 날로 정했다. 그래서 한 주가 빡세지만 토요일은 이렇게 숨 쉬는 날이다. 이 날은 다음 주 내내 싸가야 하는 점심을 미리 해서 냉동을 할 양이다. 다행이다...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멀리 보면 지치지만, 이렇게 이 순간에 즐거운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여유를 더해본다. 이제 글을 쓰고 나선 내가 좋아하는 호주식 레밍턴 케이크를 만들 예정이다. 항상,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는 걸 기억하면 숨 막힐 일도, 기막힐 일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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