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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zakka Feb 15. 2024

산동네 골목의 숨겨진 이야기

초량 이바구길과 수정동 산복도로 일대



높은 언덕에서 바라본 부산항의 모습은 수평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모습과는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저 멀리 보이는 부산항 앞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 산자락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고 그 위로 서 있는 집들은 산자락의 맥락에 맞춰 무질서하지만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다와 산을 함께 품은 독특한 지형을 갖춘 부산. 그중 부산 산동네의 독특한 경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유일무이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부산과 부산 사람들의 애환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근 지역이 품은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고 이를 도시 특유의 멋으로 알리려는 성향에 맞춰 부산의 산동네도 함께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집마다 불법적으로 지어야 할 만큼 만만치 않던 인생들이 몰려들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했던 산동네. 토박이가 드물정도로 외지 사람들이 많았던 부산의 역사에서 산동네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살아봤던 경험이 있을 정도로 필수 코스와도 같은 곳이다.


서민들의 원초적 생활공간이라는 위상과 함께 지역적 정체성의 ‘부산성’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산동네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높은 곳에 살고 있지만 낮은 곳에 살기를 바라며 산복도로를 오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어제의 부산이 밟았던 길이 있고, 오늘의 부산이 만든 길이 있고, 내일의 부산이 가야 할 길이 있다. 낙후되고 재개발도 힘들었던 부산의 산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며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찾으러 떠났다.



산동네로 모여든 사람들



일제강점기 급격히 개발된 부산은 지형적으로 평지가 협소해 거주 가능한 면적이 좁았다. 그마저도 산과 바다 사이 좁고 긴 모양의 선형 구조로 확장이 어려운 도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는 부산은 일본의 각종 토목 공사와 수도·항만·철도 등의 사회 기반 시설 등이 세워지면서 오늘날의 유산한 형태로 형성되며 인구 역시 급증하게 된다. 근대적 도시 계획과 각종 도시 기반 시설 조성은 일본 전관 거류지인 초량 왜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지금의 영주동과 대청동을 경계로 거주 지역이 나누어졌는데, 일본인들은 시내 중심부를 차지하고 조선인들은 도심 주변, 혹은 산기슭에 정착하거나 영도로 강제 이주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이 일본식 주택, 가로 구획, 상수도 시설 등 체계적인 도시 계획으로 근대 도시를 만들었을 때, 조선인들은 도로, 수도,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았다.


1920년대 초 부산은 공업과 대일 무역의 성장, 대규모 토목 공사 등으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 수가 급증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 수의 급증으로 임금은 떨어지고 고용 구조가 불안해지게 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용직 노농자들이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도심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본인 거주 지역의 외곽에 있는 산비탈이나 고개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게 된다. 그렇게 부산의 산동네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경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형성된 독특한 도시 공간이다.



산복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계획 없이 불규칙하게 지은 토막과 꼬불꼬불한 험악한 길이 거미줄 모양으로 엉켜 있는 듯한 모습을 취한다. 평지에 집을 얻지 못한 조선인들은 부산진 본전 신상에다 집을 지어 모여들었고 광복 이후 및 한국전쟁으로 부산은 북새통을 이루게 된다. 일제에 의해 건설된 인구 30만의 계획도시에 약 100만의 인구가 밀집하게 되고 전쟁의 피해가 없던 유일한 지역으로 부산으로 사람들은 몰려들면서 거주 환경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당시 부산에는 영도 봉래동, 대연 고개, 등 전쟁 피난민들을 위한 수용소가 40여 개 가 있었지만 수용 인원은 턱 없이 부족했다. 이에 반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40만 명 이상 달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경제력이 약하고 연고가 없는 피난민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용두산 공원이나, 수정산 자락에 삶의 둥지를 틀었고 그렇게 산동네는 6·25 전쟁의 경험이 그대로 엉켜있는 공간이 된다.




도시 빈민의 생활공간, 판잣집


부산에 자리를 잡은 이주민들은 미군들의 폐품으로 나온 깡통을 펴서 엮어 만든 양철 판이나 군수 물자를 포장했던 박스, 판자·콜타르를 바른 미군용 야전 식량 박스(일명 볼박스) 등으로 엮은 무허가 판잣집인 이른바 하꼬방을 지어 살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사생활을 중시해 점점 더 산꼭대기로 올라가거나 높은 담장을 이뤄 집을 지어 살지만 당시엔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일수록 점점 더 산꼭대기로 올라가 보금자리를 형성했다. 나무, 판자, 골판지 등 기껏 바람정도 막을 수 있는 초막을 지어 살림을 꾸렸다. 부실한 건축 자재로 만든 집이 얼마나 튼튼했으랴. 방수, 방풍, 보온은커녕 난방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겨울을 보내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인화성 높은 건축 재료와 다닥다닥 붙은 주택 구조로 인해 크고 작은 화재가 빈번했다.



또한 산동네에는 판잣집이 먼저 들어서고 그 사이사이로 길이 만들어졌다. 골목길은 좁고 각기 다른 폭으로 불규칙하게 미로처럼 퍼져 있으며, 그 미로는 다시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다. 골목길과 계단은 주민들을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요인이지만 반대로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주요 소통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통행로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먹고살기 바빠 만날 시간, 집이 좁아 모일 공간도 없는 이웃들이 오고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마당이자 사랑방의 역할이었다.



부산의 주 서민층을 담당하게 된 피난민들은 휴전 이후에도 몰려들었고 산동네는 자연스럽게 돌아갈 곳 없는 정착지 역할을 담당했다. 농촌 도시 근로자들이 산업화 과정 속에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면서 산동네는 내부 구성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기억을 함께 한 운명 공동체적 이웃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유입된 이웃들이 동네에 넘쳐나면서 이웃의 관계는 실리적이고 익명적인 관계로 변해간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던 생활



1960년대에 들어서며 부산시는 도시 환경 개선과 미관을 이유로 판자촌에 대한 강제 철거와 철거민들에 대한 도심 외곽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그러나 계획적인 이주지는 개발되지 못한 채 강제 철거만 시행되었다는 한계에 봉착해 산동네 특유의 자생적 형태가 유지되었고, 1980년대 아파트 투기 과열, 주택 가격과 전세 가격 폭등 등으로 거주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던 저소득층은 산비탈에 불법적으로 살게 된다. 철거 작업반원들에 밀려 보금자리를 잃으면 주민들은 밤을 새워 그 자리에 다시 판잣집을 세웠고 그 과정을 반복하는 악순환은 1980년대 후반 철거 정책이 멈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판잣집은 철거되었고 산비탈 곳곳에 무질서하게 단독 주택, 연립 주택이나 아파트가 난립하여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도로, 주차장, 소공원 등 도시 기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채 무계획적으로 판잣집 자리에 그대로 주택이 들어서 주거 환경은 열악한 곳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산복 도로 주변의 고지대 등에는 판잣집뿐만 아니라 슬레이트집, 방수천 등으로 지붕을 보수한 집들이 남아 있고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길도 여전히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건축가들의 의식적인 작업보다는 이름 없는 서민들의 건축, 즉 건축가 없는 건축에서 그 지역의 건축적 특성이 더 잘 나타난다. 산동네의 건축가 없는 건축물들은 값싼 자재와 낮은 수준의 시공 기술로 비록 그 모습이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며 조잡하게 보이지만, 그 시대 상황에 맞게 탄생한 대중적인 서민들의 건축물이다. 그래서 산동네는 부산의 역사와 함께 부산 서민들의 주거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글・사진 | yoonzakka

내용자료 | 부산역사문화대전, <산동네의 숨겨진 보물 - 골목골목 깃든 삶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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