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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빈 Jan 27. 2018

딸에게 보내는 도시락 편지: 화정에게 1995

처음에 엄마의 편지들을 20년만에 꺼내어 읽었을 때, 같이 읽던 언니가 문득 씁쓸해진 표정으로 얘기했다. 


"근데 이거 봐라. 엄마가 나한테 쓴 94년 편지랑 95년 편지 내용이 달라. 일 하기 전에는 날씨이야기, 학교 생활 이야기 위주의 감성적인 대화같은 편지인데 95년 부터는 유빈이 밥 챙겨라, 유빈이한테 양보해라, 유빈이 숙제 챙겨라하는 지시사항 목록같고 게다가 의젓한 딸, 듬직한 딸 이런 수식어 잔치야."


나는 에이~ 했지만 사실 읽어보니 진짜 그랬다. 나는 아무래도 어렸고, 언니보다 고집도 세고 투정도 많은 편였어서 내가 짜증을 한 번 부리면 온 가족이 피곤해졌다(라고 한다...) 내가 울고불고 하는 사태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엄마는 언니한테 습관적으로 '네가 양보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라고 해봐야 나보다 고작 세 살 많았을 뿐인데 지금 생각하니 서운했겠다 싶다.


같은 엄마 배에서 나왔지만 언니와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비록 나이들면서부턴 종종 '쌍둥이에요?'라는 말을 들을만큼 생김새가 비슷해지고 있긴 하지만. 맏이라는 위치에서 오는 부모님의 기대나 책임이 있을거고, 나는 분명 이해 못할 언니만의 부담이 있을테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해서 대전, 미국, 그리고 다시 울산에 이르기까지 가족 곁을 일찍 떠나 살았던 언니기에 엄마가 언니한테 느끼는 감정도 시간을 따라 변화해왔을거고.


아무튼 95년의 엄마로서는 11년만에 회사라는 곳에 돌아가서 적응을 하는 일도, 그리고 품에 끼고 다니던 딸들을 엄마 없는 집에 두는 일도 모두 쉽지 않았을 터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세 살이라도 더 나이 많은 큰 딸이 있어 엄마는 얼마나 든든했을까. 실제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보다 언니를 더 무서워하고 언니 말을 더 잘 들었다. 경시대회 전날이면 언니가 나를 옆에 앉혀놓고 같이 문제집을 풀던 기억, 빨리 오라는 언니 말 안듣고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그제서야 언니한테 혼날까봐 전전 긍긍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그리고 책임감 강한 언니 성격 덕분에 진짜 나라면 너무너무 귀찮고 싫었을텐데, 자기 친구 생일 잔치에도 꼬박꼬박 나를 데려가고, 그 와중에 남의 생일에서 밥 투정에 각종 투정을 하는 나 때문에 진땀을 빼면서도 엄마가 '유빈이도 데려가라'하면 싫다는 반항 한 번 없이 꼭꼭 나를 자기 친구들이랑 놀 때에 데려가주었다. (그때의 버릇인건가 나는 지금도 언니 친구들이랑 잘 논다(...))


엄마가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 비록 ~해라라는 말만 부쩍 늘었다 할지라도 고집불통 떼쟁이 막내 딸을 두고 엄마가 집을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직한 맏이 덕분이었으니 실은 고마운 마음이 더 많았을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담긴 편지도, 많이 있다. :)


우리 언니는 현명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 잠깐의 서운함도 엄마를 이해하며 넘겼겠지만, 나는 어릴 적 응석을 부리던 동생으로서 미안한 마음에 언니에게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엄마도 언니가 정말 고마웠겠지만, 나도 언니가 있어 참 고마웠어. 그리고 지금도 정말 많이 고마워!'


의젓한딸 화정에게


어제 저녁 먹지 않고 자서

배고프지 식탁에 간단하게

차려 놓았으니 몇 숟가락이도

먹고 가거라.

냉장고에 에이스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유빈이하고 싸우지

말고 유빈이가 먹고 싶다면

유빈이에게 양보하고 너는

밥 먹거라 밥 먹고 그대로

놔 두면 유빈이가 점심에 먹을

것이다. 그럼 이따가 만나자 - 엄마 - 






예쁜 화정에게


요즘 엄마가 없어서 힘들지.

조금 지나 적응이 되면 괜찮을거야.

전학하고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졌지

어제 엄마가 눈물을 보인 이유는

여러가지로 복잡한 감정이 있어서

그랬단다

너와 유빈이 걱정,

결혼후 처음 직장생활에서 오는

긴장감 등

그렇지만 엄마는 잘 해낼거야

그리고 문단에도 꼭 등단 할거야

화정이는 종이접기 급수 완성해야 

한다.

누가누가 먼저

급수를 따나

문단에 등단하나

내기 하자

열심히 하거라


95. 4. 13 아침

엄마

"엄마가 직장 나간다고 공부에

소흘하지 말고 더욱더 열심히 하여

항상 자랑스런 화정이가 되어주길....

물론 현재도 아주 잘 하고

있어 엄마는 흐뭇 하단다."

예쁜 딸 화정아!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구나

이번주에도 건강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주가

되자꾸나

그럼 이따가 만나자


95. 5. 8 엄마

예쁜 손톱 화정에게

가스렌지 후라이팬 위에

햄버거 고기 해 놨으니

학교 갔다와서 배고프면

야채 박스 안에 상추 있으니

햄버거 빵 사다 해먹어라

우선 네 용돈 쓰면 엄마가

줄께

유빈이는 아침에 하나 해서

먹여서 보내라.

유빈이 고은이네 집으로 가라고

해라 부탁한다 95.5. 30 아침 엄마

화정아

냉장고 비니루에다 햄버거

고기 해놓았다.

먼저 후라이팬을 가스렌지

위에 올려 놓고 불을

약하게 한 후 기름을

조금만 붓고 구워 먹어라.

햄버거 빵 사거라

돈 놓고 갈테니까.


95. 5. 31 엄마












화정에게

요 며칠 엄마가 일찍 

나갔는데도 잘 해주어

고맙다.

오늘까지 참으면 내일은

늦게 나가니까 안심해라.

후라이팬에 햄버거 고기

해놨다. 이따가 간식으로

맛있게 먹어라

그럼 이따가 만나자 

95. 6.1 아침 엄마 (뒤로)

엄마 올때까지

웅진 아이큐 12회 완전하게

해놓아라.

하기 전에 요점학습 읽는 것

잊지 말아라.

꼭 해놓기 바란다.


화정아

잊지말고 냉동실에서

물 꺼내 갖고 가거라

학교 갔다온후

피아노 끝나고

학습지 공부 해놓아라.

곧 시험이 있으니까

대비해야지.


6.9 아침

엄마

화정아

에이스 먹고

유빈이 냉동실에서

물통 꺼내서 보내라

2000원 놓고 갈테니

식빵사다 구워먹어라

너를 사랑하는 엄마


95. 6. 29


사랑스런 화정에게

유빈이 잘 일어났니?

일어나거든 꼭 에이스 먹고

유빈이는 끝나거든 고은이네

가서 점심먹고

너는 집에 와서 식탁에

2000원 있으니까 김밥

사먹든지 라면 끓여 먹어라

집에와서 유빈이랑 책 보고

있거라


95. 7. 1 엄마


엄마의 소중한 딸 화정에게


오늘은 0도 란다.

영상 1도와 영하 1도의 중간.

아주 공정한 온도로구나.

요즘 엄마가 매일 나가 힘들지.

네가 잘해주어 엄마는 직장에서도

신나고 집에 오면 딸 들이

100점 맞았다고 자랑해 집에 와서도

신난단다.

우리 조금만 참아보자.

구름이 끼고 흐린날이 있으면 그 후에는

반듯이 맑고 개인 날이 있듯이

요즘 엄마가 바빴으니까 조금 있으면

한가해 질거야.

그럼 오늘 오후에는 엄마가 일찍 올께

엄마랑 함께 있자. 

11/22 아침 엄마


화정아

이제 4학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곧 겨울방학도 시작되고.

올 1년동안 아주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엄마가 혈액원에 나가고

화정이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

상을 타고 컴퓨터를 잘 하게

되고 아무튼 화정이가 너무

대견스럽다. 네가 이만큼 잘 해주는

것도 큰 기쁨인데 엄마는

너에게 더 많은걸 요구하게

된다. 결국은 엄마의 사랑하는

사랑하는 딸이기 때문에 그럴거야

그럼 이따가 만나자


12.11 아침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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