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 그림일기
"나, 엄청나게 내향적인 사람이거든요."
딱 부러지는 말투에 주관도 취향도 분명한 친구였다. 사람들 앞에서 또렷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펼칠 줄 알았다. 꼿꼿한 자세와 당당한 태도가 꼭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이는 데에 괜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구나 싶어 부러웠다. 발표할 때 심장이 쿵쾅대고 얼굴이 달아올라 떨리는 목소리로 끝을 맺는 나와는 정반대니까.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내향적'이란 말은 영 설득력이 없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라니?
"나, 낯도 많이 가리고 환경 영향을 많이 받아요. 특히나 상대와 제대로 대화해보기 전에는 먼저 말을 못 붙이는 그런 거 있잖아요."
아하.
정반대 타입 같은데 나랑 왜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나 했는데, 의문이 좀 풀렸다. 나와 꽤나 비슷했던 거다. 서로 다른 모양의 껍데기를 단단히 두르고 있을 뿐. 타인이 내게 성큼, 한 걸음에 다가오는 게 영 불편한 소심쟁이들이다.
한꺼풀, 나를 덮는 가면이 필요한.
친구의 강해보일 정도로 또렷한 자기주장은 사실 주변에 미리 보여주는 자기소개 간판이 아닐까. 나는 이런 사람이니, 다가오기 전에 숙지하고 오세요. 나는 당신과 안 맞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그렇게 한 번 성벽 밖으로 해자를 파는 거다. 그 거리를 무릅쓰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큰 소리로 내 의견을 드러내기 어려워 하는 나의 물렁한 태도는 사실 음흉한(?) 접근이다. 진입장벽을 최대한 낮춘다. 상대가 누구든, 마음을 풀 때까지 '털털하고 사교적인 사람' 연기를 한다. 상대가 불편하게 느껴지면, 끝까지 그 태도를 풀지 않는다. 하지만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슬그머니 긴장을 늦추게 된다. 나 이런 사람이니, 나한테도 맞춰주세요.
일 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정말로 '성격'이 바뀐 걸까.
직장생활을 하고부턴 학생 때보다 사람 대할 일이 훨씬 더 많아졌다. 연령에 관계없이 능청스레 친한 척 너스레도 떨고, 먼저 손 내밀며 말 걸 줄도 알아야 한다.
불편해서 매일 쥐구멍에 숨고 싶었더랬다.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매일 아침 심호흡을 하고 가면을 썼다. 나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 좋다, 좋다, 이렇게 최면을 걸고서.
일에 푹 빠져 살 땐 가면 벗는 걸 잊고 살았다. 집에 돌아서도, 친한 친구들을 만날 때도, 늘 웃고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하지만 아무리 내 얼굴인 척 해봐도 가면은 내 얼굴이 될 수 없다. 화장을 지우지 않으면 피부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결국은 원래의 내가 징징대며 껍질을 뚫고 나온다. 사람들 속에서 쉽게 피곤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나를 외면하지 말라고.
성격이 바뀐 게 아니라 가면이 두꺼워진 거다.
직장생활 6년차. 이제는 집에 돌아오면 가면 벗는 방법을 터득했다. 가끔은 이게 회사에서도 벗겨지려 하는 게 문제지만.
좀 더 노련해지면, 꼭 써야할 때에만 재빨리 가면을 썼다가 벗는 기술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주말이다.
가면 따위 잠깐 내동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