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림일기]
업무능력은 사실 업무를 많이 할수록 좋아진다. 선배들은 그랬다. 일복 많은 건 네 복이고, 앞으로 큰 사람 될 거라는 뜻이라고.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라고. 뭐 내 입으로 인정하기 싫지만,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편이다. 일을 너무 안 하면 내 능력이 의심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니까. 그래서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 사실 조금씩 요령이 붙고 보이는 게 많아지는 걸 느끼면 신이 난다. 점점 같은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단축된다. 나도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우쭐해진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할 일은 집중해서 재빠르게 해치우고 삶의 밸런스도 찾을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한 지 몇 년이 지났다. 분명 일은 손에 익었는데 이상하게 일과 삶의 밸런스 따위 없다. 가만 살펴보니 업무능력에 맞춰 일도 늘어난다. 근력운동을 할 때 조금만 익숙해지면 중량을 약간씩 늘리는 것처럼,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히. 뭐, 나쁘진 않다. 그만큼 나한테 뭔가 더 남겠지, 배울 수 있겠지. 일할 수 있는 건, 그리고 일이 재미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아쉬운 건, 여유롭게 누릴 내 시간이 생길 날은 영영 안 올 듯 싶다는 거. 여유는 언제 생기지?
일복보다 좀 더 부러운 건 일을 적당히 끊어내는 능력이다. 잘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을 받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적당한 시간에 일을 마치는 능력. 그러려면 가진 능력치의 120%를 발휘하려고 끙끙대선 안 된다. 붙잡은 일은 확실히 처리한다고 인정은 받으면서도 일 하나를 더 맡길 정도의 여유는 보여주지 않는 선. 그러려면 능력치의 93% 정도 발휘하는 게 좋지 않을까, 막연하게 상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누가 아시면 좀 알려주세요. 뭐, 수치를 알게 되더라도 실행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성격에 달린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만.
부럽기만 한 게 아니라 고치고 싶은 습관은 회의 때마다 열심히 대답하고 손 드는 습관이다. 내가 헤르미온느도 아니고, 대체 왜 그 침묵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깨야 속이 시원한 걸까. 경험적으로 안다. 적극적인 태도는 일을 부른다는 사실. 그렇게 겪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지, 일을 떠안는 것보다 모두가 책상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그 침묵의 순간을 견디는 게 더 어렵다. 감당 안 되는 일거리를 붙들고 인생에 길이 남을 정도로 쩔쩔매 본 뒤, 이번에야말로 굳게 결심했다. 입을 다물자.
결론. 입이 문제가 아니다. 채팅 회의도 있다는 게 함정. 오늘도 역시나 회의 중 흐르던 잠깐의 침묵. 몇 분 버티지 못한 내 손은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빠르게 자판 위를 움직였다. "제가 할게요~"
회의는 끝났고, 일이 또 늘었다. 일복은 그냥 내가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