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을귀인(天乙貴人)
인생은 가끔,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 하나로 달라진다.
어른의 문은
우연으로 도착하여
운명으로 열게 되었다.
스물여섯.
첫해 드론 일이 끝났다.
방제만 하기엔 시즌 일이었고,
가업을 잇기엔 규모가 작았다.
나는 손을 더 이상 벌리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벌고,
스스로 버티고 싶었다.
가진 건 드론뿐.
하우스를 하던 후배의 무심한 한마디가
내 안을 툭 건드렸다.
"형, ○○○에서 봤는데
이런 것도 있더라고요."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열 차단 페인트였다.
“이걸 축사에도 뿌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농약이 아닌 ‘활용’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점점 길고 뜨거워지는 여름.
하우스에 도포할 수 있다면,
축사도 가능할 거라 여겼다.
그렇게 열 차단 페인트를 처음 알게 되었다.
무작정 업체들에 전화를 걸었다.
견적, 효과, 유통, 대리점 유치.
의욕적으로 자료를 모았지만,
'괜한 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심스럽게 축사에 계신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
열 차단 페인트가 있는데,
이 정도 금액에 이 효과면
아버지는 시공하시겠어요?"
아버지는
"효과만 보증되면,
괜찮은 것 같다"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에
사업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앞으로 중요한 건,
실제로 효과가 있느냐였다.
그 해 가을.
전라도와 경기도를 오가며
전화벨은 쉼 없이 울렸고
의욕은 용광로 같았다.
그때 나는 어렸고,
젊었다.
제품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드론 전용 차광제,
인력 중심 차열제.
하지만 경험은 없었다.
영업에 ‘영’ 자도 몰랐고,
세상 물정도 몰랐다.
세상이 무서웠고,
계약이 두려웠다.
순수한 만큼 사기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내 회사는 상상도 못 했다.
결국 지인과 어른 한 분.
셋이 움직였다.
우리는 현장,
어른은 사무를 맡기로 했다.
하지만 일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차열제는 인력시공이 베이스였고,
드론시공을 부차적 영역으로만 봤다.
그때부터 균열이 시작됐다.
그들은 드론을 위주로
두 제품 모두 유통하자 했고,
나는 거래처와의 관계에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력 시공이 위험하다 했지만,
나는 완성도와 효율성 부분에서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간절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기회였다.
간절했던 만큼,
나는 많이 조급했다.
결국 우리는 갈라섰다.
서운한 말들.
어긋난 연락.
멀어진 사이.
그때의 나는
감정이 논리보다 먼저였고,
대화의 기술은 부족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차악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또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고,
결이 다른 사람들이 엇갈린 일이었다.
나는 인력 시공 제품을 택했고
본사 대표님은 내 독립을 지지해 주셨다.
"모르는 건 알려줄 테니, 해봐."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혼자 나아갔다.
스물일곱 1월.
내 이름으로 된 사업자등록증이 생겼다.
'최선을 다하면 세상을 가질 수 있다.’
이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러나 등록증 하나뿐이었다.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
직원도, 명함도, 로고도 없었다.
오직 나 하나.
두렵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설레는 순간이었다.
어린이와 어른사이,
그 문을 넘는 기분.
명함을 만들고,
전단지를 찍고,
자료를 정리했다.
지자체와 면사무소를 돌기 시작했다.
지금 다시는 못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실행에 옮기고 나니,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다.
고향에 연고는 없었고,
또래를 찾기 시작했다.
사업보다 사람이 어려웠다.
작업 시작 한 달 전,
아버지가 한 동생을 소개해주셨다.
스물셋.
"결이 비슷할 거다."
그 말은 맞았다.
그렇게
동생과 미팅하게 되었다.
첫 만남 날 새벽 5시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나의 결이
닮았다는 걸 느낀 건.
많이 달랐지만,
많이 닮았다.
천군만마.
그날의 공기와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미팅 전날까지
아버지의 삼고초려가 있었다는 것은
그날의 대화에서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 동생과 자주 본다.
최근에 나에게 말했다.
“형, 그때는 눈이 진짜 매서웠는데,
지금은 눈이 깊어지셨네요.
저는 아직도 감사하고, 많이 배우고 있어요.”
‘귀인’이란 말이 있다면,
그건 결국 사람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시공 시즌.
작업 중 팔이 부러졌지만,
그 동생이 사수로 올라와 현장을 감당해 냈다.
가을.
드론 방제까지 마무리되었다.
스물일곱.
나는 사장이었다.
프리랜서였다.
동시에
직원이었다.
어느 날은 드론을 띄우고
어느 날은 페인트를 도포하며,
어느 날은 서류를 정리했다.
돈이 없을 땐 몸을 굴렸고,
일이 없을 땐 머리를 굴렸다.
몸이 쉬는 날은 있었지만,
마음이 쉬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내가 멈추면,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다.
무서울 틈도 없이,
1년이 흘러갔다.
스물일곱의 겨울.
한 해를 돌아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한국 사회처럼,
나는 빠르게 어른이 되었지만,
속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이 삶을 몰랐고,
어른들은 결과만 보려 했다.
말해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과정보단,
결과가 중요하니까.
심지어 나조차
왜 힘든지 몰랐다.
고독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다.
술을 마셨고,
잘 때마다
외로움을 끌어안았다.
무엇이
나를 무너지게 했을까.
무엇이
나를 곪게 했을까.
질문은 스스로를 향했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깊은 어딘가로 데려갔다.
얽힌 실타래처럼,
하나하나 되짚으며
나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아주 먼 과거로,
나를 데려가기 시작했다.
4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