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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Jun 22. 2023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숨통>을 읽고


 할아버지, 할머니 집은 안채와 별채가 기역으로 놓여 마당과 텃밭을 어느 방에서나 내다볼 수 있는, 오래된 나무 마루와 기둥이 남아있는 개량 한옥이었다. 나무의 아빠는 집에서 장남이고 나무의 오빠는 장남에게서 태어난 장남이니, 고향에서 참 귀한 사람들이다. 여자아이인 나무는 그저 오빠랑 같이 시골집에 간 옆에 있는 애였고, 주로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 옆에 있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의 며느리와 손녀는 행복하지 않다. 할머니와 고모들, 엄마와 나무. 여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환경이다. 그나마 고모들은 명절에 친정에 와 하루 쉬어 가고, 고모들의 식사는 며느리가 준비하는, 나무는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고 명치가 꽉 틀어 막히는 것 같다.

 나무가 여섯 살이 된 설날에 가족과의 관계, 특히 어른들과의 관계가 정리되는 역사적인 일이 좀 있었다. 여성들이 만든 음식으로 생색은 아저씨들이 내는 설 아침. 나무의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무 오빠에게 자전거를 사라며 세뱃돈을 줬다. 구겨진 곳 없이 깨끗한 흰 봉투 안에는 10만 원이 들어있었는데, 장손이 초등학교를 입학한다고 하니 큰맘 먹고 준비한 듯했다. 그리고 그다음 옆에 있던 나무에게는 만 원을 줬다. 봉투에 담아 주셨던가, 나무는 봉투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뒤에 있었던 일은 기억난다. 세뱃돈 받아 좋겠다며 어른들이 ‘와아~’하고 방청객 호응을 해주었지만 나무의 기분은 별로였다. 액수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빠는 10개, 나무는 1개였다. 

 어린애들이 딱히 놀러 나갈 곳 없는 시골집에선 집 안 구석구석, 마당 구석구석으로 집요하게 영역을 넓히며 모험을 떠난다. 새로 2층 양옥을 지은 옆집 때문에 더 그늘져진 안채 뒤뜰에는 허리 높이의 관상용 식물이 자라는 화단과 텃밭, 그 옆 한 계단 높은 자리에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 사이로는 가끔 뱀이 스스스 기어 나오고, 어린애들의 할머니가 시집오기 전부터 있었다는 오래된 항아리에 씨간장, 된장, 고추장, 절인 무, 나무의 엄마가 음식마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놀랐다는 온갖 짠 것이 들어있었다. 그 널따란 장독대에 크고 작은 장독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항아리 둥근 면 네 개가 모여 만든 공간에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짓고 살고 있었다. 나무는 거기라면 아무도 못 찾을 거로 생각했다. 여섯 살 나무의 생각엔 집안에서 가장 구석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오직 나무만 아는 곳, 장독 사이의 어둡고 깊은 공간이었으니까. 나무는 주변을 둘러보고 그 자리에서 만원 지폐를 아주 잘게 찢었다. 그리고 거미줄 위에 잘게 찢은 만원을 뿌렸다. 돈을 찢으며 나무는 ‘이런 건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다.                        

 세뱃돈으로 받은 만원이 어디 있는지, 엄마에게 뭐라고 둘러댔는지 나무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할머니가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본인 입술처럼 꼭 오므린 손에 나무가 정성스럽게 거미줄 위에 뿌린 만원을 주워 왔다는 거, 그 뒤로 아빠에게 손으로 엉덩이 맞으며 엄청나게 혼났고 삼촌이 말리러 달려왔다는 거. 그리고 엄마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전부다. 나무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이 일을 떠올렸을 때 ‘어린 게 참 독하다’라는 생각도 했다가, 조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지금 떠올려 보면, 보자기에 싸여 엄마 등에 업혀 있을 때부터 부푼 서운함이 세뱃돈에서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만원을 찢던 여섯 살 여자애 마음을 생각해본다. 서운하고 어른들이 미웠지만, 나무가 돈을 찢을 때 그 만원은 이미 아무 의미가 없었고 중요한 돈이 아니었다. 그건 만 원 한 장이 아닌 ‘관심 없음’과 ‘애정 없음’이라는 ‘종이 한 장’이었다. 

 나무가 돈을 찢은 그 후, 어른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놓고 차별하진 않았다. ‘오빠는 첫째니까 어쩔 수 없이 이걸 먼저 해주는 거다. 다음엔 너도 꼭 해주마.’ 설명이 덧붙여진달까? 근데 어른들이 그 약속을 진짜 지켰는지 나무의 기억은 희미하다. 자라면서도 크게 기대는 안 했고 집안 행사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무관심으로 무장한 아웃사이더로서 나무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시작되었고, 나무의 마음은 집안 어른들에게서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저 혼자 자유로워진 나무가 자책할 만큼 모든 자리에 최선을 다하던 엄마의 며느리 역할은 몇 년 전, 엄마가 할머니의 눈을 감기며 최종 종료되었다. 




<숨통>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ㅣ황가한 옮김ㅣ민음사ㅣ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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