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고동촌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 시간을 넘게 통화를 한 것 같다. 수화기를 놓고 창밖을 바라본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그리운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꼬리를 문다.
그리운 기억은 하지기재에서 시작된다. 예나 지금이나 고향마을에서 유일하게 읍내로 나가는 통로였다. 하지기재, 언제 들어도 정겹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바닷물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읍내에 사는 아이들은 갯벌에 널려있는 고동을 잡으러 주전자를 들고 하지기재를 넘어왔다. 우리는 읍내 아이들을 고동촌놈이라고 불렀다. 바닷가에 사는 우리에게는 흔해서 잘 먹지도 않은 고동을 잡으러 오는 것이 신기해 고동촌놈이라고 놀렸다.
우리들은 하지기재 내리막길에서 고동촌놈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다 싶을 때면 우르르 그들을 향해 돌진하며 소리쳤다. “고동촌놈 잡아라. 고동촌놈 잡아라.” 우리들이 외치는 소리에 고동촌놈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났다.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는 아이들을 뒤쫓아 가다 보면 아주 작은 샘이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는 참샘에 엎드려 목을 축이고 돌아왔다. 길가에는 고동촌놈들이 버리고 간 노란 주전자가 나뒹굴었다. 주전자를 들고 개선장군이나 되듯 의기양양하게 바다로 달려갔다.
바닷물이 나간 갯벌 위에는 고동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어른들은 낙지를 잡기 위해 바다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우리들은 방죽에서 멀지 않은 갯벌에서 고동을 잡았다. 고동이 주전자에 가득 차면 집으로 돌아와 고동을 삶았다. 삶은 고동은 탱자나무 가시로 빼서 먹어야 제 맛이었다. 쌉싸름한 맛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면, 고동촌놈들을 쫓아버린 야박한 인심을 나무라는 고동의 지청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하지기재를 지키는 일을 소홀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도, 언니 오빠도 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알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한 학년에 4반까지 있는 아주 조그마한 학교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같은 반에 고동을 잡으러 왔다가 도망갔던 아이들이 있었다. 고동촌놈들은 어찌 된 일인지 우리를 원수로 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친절했다. 여름이면 아이스께끼를, 겨울이면 붕어빵으로 바닷가 촌뜨기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따뜻한 호의가 고동을 잡기 위한 고단수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우린 모르는 척 눈을 딱 감고 그냥 넘어가 주었다.
까까머리 중학생 남자애들은 학교를 마치면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그러다가도 고동촌놈들이 나타나면 달려와 쫓아 보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철통 같았던 재가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애들이 소녀들의 하얀 얼굴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뒤통수만 긁어대다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뒷걸음쳤다. 38선보다 더 튼튼했던 하지기재가 아니었던가. 하얀 피부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바닷물이 나가기 시작하기 무섭게 고동촌놈들은 우르르 재를 넘어왔다. 보들보들한 갯벌에 누워 있던 고동들은 잡혀가면서도 실실 웃는 것만 같았다. 녀석들도 하얀 얼굴에 그만 마음을 빼앗긴 모습이었다. 고동촌놈들의 하얀 피부는 비단 남학생들의 마음만 녹였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샘가로 달려가 세수부터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세수를 해도 고동촌놈들처럼 하얀 피부가 되지 않았다.
등굣길 한 시간, 하굣길 한 시간, 그렇게 하루 두 시간을 걸어 다니니 어떻게 하얀 피부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등굣길의 아침 해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하굣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만나 한층 더 뜨거워진 해는 얼굴이며 팔다리를 구릿빛으로 만들었다. 우리들은 하얀 피부를 가질 수 없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라고 생각하며 일찌감치 체념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만큼 부끄러운 기억이 고개를 내민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교실 앞 신발장에서는 다른 색깔을 하고 있는 운동화가 있었다. 모두 까만 운동화인데 황토색으로 얼룩진 운동화는 바로 하지기재를 넘어온 우리들의 운동화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 하지기재를 넘어온 신발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수돗가에 가서 씻어도 읍내 아이들의 운동화와 같을 수 없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하얀 얼굴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여자중학교 3년, 여자고등학교 3년 그렇게 6년 동안을 고동촌놈들과 하지기재를 넘나들며 우정을 쌓았다. 고동촌놈들과의 인연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 년에 서너 번씩 고향에 내려간다. 그때마다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여중학교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거린다. 몇 해 전 봄날이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교단 뒤 벚나무 두 그루가 분홍빛깔의 꽃을 만개하고 있었다. 그새 벚나무는 고목이 되어 있었다.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은 모두 벚꽃처럼 맑고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신발장에 나란히 놓인 운동화들 중에 황토색 신발은 더 이상 놓여있지 않으리라.
시간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황토색 신작로였던 하지기재에는 까만 아스팔트가 깔렸고 사람들을 실은 버스가 동네마다 돌아다닌다. 고동들이 일광욕을 즐기던 갯벌은 황금빛 들녘이 된 지 오래이다. 까만 얼굴이 불만이던 우리들은 도시에 살면서 하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가 있다. 바로 기억의 조각들이다.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눈을 감으면 고동촌놈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입가에 미소가 오래도록 머문다. 그 시절이 그리운 날이면 또다시 수화기를 들게 되리라.
요즘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지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