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둘기가 우는 아침이면 으레 앞산을 오른다. 오늘따라 울음소리가 더욱 구슬프다.
어머니 품속 같은 산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크고 작은 돌탑을 만난다. 한적한 곳에 둥글게 올라가고 있는 돌탑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선다. 돌 하나를 찾아 올리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문득 고향집 근거리에 있는 유자 밭 한가운데 있는 돌무덤이 떠오른다.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 고향에서 텃밭을 일구며 살아오신 어머니는 자식들한테 짐이 되지 않겠노라고 수없이 말씀하셨다. 그러구러 어머니 연세 아흔을 맞았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낙상과 치매 증상 앞에 그만 어머니는 백기를 들고 아들을 따라 올라오셨다. 자식들은 저마다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모시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요양원이 편하다 하셨다. 자식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이후 나는 요양원을 친정집 가듯 드나든다. 다행스러운 것은 네 시간을 넘게 차로 달려가야 도착했던 고향집에 비하면 가까워서 좋다.
주말이면 어머니는 예쁘게 단장을 하고 자식들을 기다린다. 자식을 반기는 환한 미소가 아기의 맑은 웃음을 닮았다. 함께 방을 쓰고 있는 할머니들의 부러운 눈빛에 서둘러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길러내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모시지 못한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은가 보다.
자식이 힘들어할까 봐 서둘러 요양원으로 가신 어머니다. 고운 얼굴이 고향집 뜰에 핀 매화꽃처럼 청초하다. 주인을 잃은 매화나무는 이른 봄 언제나처럼 꽃을 피웠을 테고 지금쯤 푸른 매실은 하염없이 어머니를 기다리며 초록색 대문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디 매실나무뿐이겠는가. 참새들은 마당에 어머니가 뿌린 묵은쌀을 얼마나 기다릴까.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나는 홀로 남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감나무 아래에 앉아 재잘대는 참새들에게 어머니를 십 년만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헤아려보니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딱 십 년을 채우고 고향을 떠나왔다.
요양원 근처 식당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게 되었다. 떡갈비다. 먹기 좋게 조각을 내어 숟가락에 올려 드리면 매번 처음 드시는 것처럼 맛있게 드신다. 그 모습을 보면 콧날이 시큰거린다. 텃밭에서 손수 기른 채소들만 좋아하고 고기는 안 좋아하신다던 말이 거짓말이었나 보다. 목이 메어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건 남편도 매 한 가지인 모양이다. 주말이면 그가 먼저 어머니께 가자고 서두른다. 그는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알리라.
식사를 마치고 나면 카페에 들른다. 커피를 마시면 기운이 나서 일을 할 수 있다 하신다. 노란색 봉지커피밖에 모르셨던 어머니를 위해 달달한 캐러멜 마키아토를 주문한다. 이제 일도 안 해서 커피를 끊었다고 손사래를 치다가도 막상 커피가 나오면 양손으로 컵을 잡고 한 모금씩 마신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사위 손을 잡고 한동안 놓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 우리 둘은 어느덧 눈시울이 젖는다.
어머니는 자식들 집보다 요양원이 더 좋다고 하신다. 그 말이 거짓임을 나는 안다. 고기를 싫어하신다며 입에도 대지 않던 어머니가 떡갈비를 맛있게 드시고 있지 않는가. 칠 남매를 키우느라 고기 한번 맘껏 못 드시고 봉지커피로 기운을 내서 일하신 어머니다. 요양원이 편하고 좋다는 어머니의 거짓말은 어쩌면 자식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이 아닐는지.
요양원으로 떠나기 전날 목욕을 시켜 드렸다. 어머니의 왼손 검지손가락이 유난히 짧은 것을 알게 그때 알았다. 친정의 도움으로 척박한 땅을 사서 마침내 유자 밭으로 일궈내느라 검지손가락은 조금씩 닳아 짧아졌으리라. 해가 갈수록 유자 밭에 있는 돌무덤의 키가 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손가락이 닳아 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날 밤 어머니의 짧아진 손가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밤새 뒤척였다. 어머니는 바람 불면 넘어질까 비 오면 큰 물에 떠내려 가버릴까 조바심하며 유자나무를 키웠을 것이다. 유자나무 사이 빈 터는 사시사철 놀아보지 못했다. 한겨울에도 유자나무 곁에서는 마늘이 심어져 푸르게 자랐다. 호미 끝에 걸린 돌멩이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돌무덤을 쌓아 올리며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신 그 원동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제 아버지도 떠나고 자식들 뒷바라지할 일도 없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이따금 해질 무렵이면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한다. 목적지는 언제나 ‘호산’이다. 명치끝이 아려온다. 아직도 유자 밭에서 돌을 쌓고 싶은 것은 자식들을 향한 기도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인가. 부디 자식들을 향한 어머니의 기도가 지상에서 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기도이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 다녀와야겠다. 유자나무는 검푸른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서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의 발걸음 소리에 얼마나 반가워할까. 유자 밭에서 어머니와 내가 돌을 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돌무덤에서 어머니의 기도와 내 기도는 서로 만나리라. 그 순간이 이왕이면 어머니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석양이 곱게 물든 때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