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와 마라도

by 오솔길

지금 누군가가 그리운 이가 있거든, 제주의 여러 올레길 중에서도 송악산 올레길을 걸어보라. 혼자여도 좋고 누군가와 함께 걸어도 좋으리라. 어차피 여럿이 가더라도 이내 혼자가 되리니.

널따란 아스팔트길을 오른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니 저 멀리서 산방산이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든다. 소나무가 많아서 송악산이라 이름 지었으리란 예상이 맞았다. 오르막길 끝에서 소나무 숲을 만난다.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왼편으로는 푸른 바다를 감상할 수 있고, 오른편에서 은은하게 번져오는 솔잎향기를 맡을 수 있으니 눈과 귀가 한꺼번에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걷다보면 이내 예쁜 돌들이 깔린 길이 등장하리라. 그때쯤 깊게 심호흡을 하고서 눈을 들어 바다를 바라보라. 멀리 수평선 앞에 나지막이 누워있는 두 개의 섬,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이리라.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라. 출렁이는 잔물결들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서로 그리워만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리라.

송악산 올레길을 걷다보면 수없이 많은 나무계단이 만난다.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나무계단 그 어디라도 좋다. 무작정 그곳에 앉으라.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이루지 못한 그들의 사랑노래가 애절하게 들려온다. 그 누구의 간섭도 없으니 한 시간, 아니 한 나절이면 어떠한가. 마침내 가슴속 층층이 쌓여있던 그리움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거든 그때쯤 일어서도 좋으리라.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가슴속 깊이 잠든 그리움이 떠나갈지 저마다 다르리라. 누구나 그리움을 담아놓은 깊이가 다를 것이므로.

많은 이들이 바다 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나도 가파도와 마라도를 바라보며 오래 앉아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주 오래 전,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었다. 스물여섯 살, 그즈음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고, 나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한사람을 떠나보냈다. 우리는 푸른 바닷가에 앉아 서럽게 울었다. 바다는 울음을 숨겨주려는 듯 파도를 수없이 밀려 보냈다. 희미해진 기억 너머로 그날의 파도소리가 아직도 들려온다.

평생 혼자 살자고 다짐했던 우리는 몇 년 후 비슷한 시기에 서로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만났다. 인연이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운명처럼 다가온 소중한 인연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우리는 그 어떤 운명의 힘이 이끌려 결혼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향해 비장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운명론자가 되었다.

결혼이라는 여정 길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구불구불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은 그저 소나기에 지나지 않았다. 예고도 없이 시련은 찾아들었다. 태풍은 예고라도 하고 왔지만 인생길은 그 어떤 예고도 없이 불어 닥쳤다.

십여 년 전 친구는 자신의 간을 남편에게 절반을 줬다. 가족 중 누구도 맞지 않아 줄 수 없었는데 친구가 맞아서 간을 이식했으니 어찌 운명론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매순간 그 어떤 운명의 힘에 이끌려 지금까지 흘러왔으며 지금 이 순간도 진행형이라고 여긴다.

지금도 가끔 만나면 제주 푸른 바다 앞에서 서럽게 통곡하던 날을 이야기하곤 한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제주의 푸른 바다에게 받았던 위로를 잊으면 안 된다며 너스레까지 치곤한다. 어느새 슬픔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것을 알게 된 나이에 이르렀다는 뜻이리라.


왼편으로 펼쳐진 바다와 함께 다시 걷는다. 일어나는 시간에 차이가 있어서인지 저마다 홀로 간격을 두고 걷는다. 앞서 걸어가는 이들의 상념을 바람이 실어간다. 내 상념도 바람이 거두어 간다.

가장 앞장서서 은빛 머리카락을 날리며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은 근엄하기까지 하다. 온갖 비바람을 다 견뎌낸 송악산의 소나무처럼 위풍당당하다. 아니 오랜 세월 파도가 빚어 낸 송악산 해안가에 펼쳐진 주상절리를 더 닮았다.

송골송골 맺힌 콧잔등의 땀방울이 잠시 쉬어가길 청할 즈음, 산수국 군락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푸른 바다가 보내온 바람을 맞고 자라선가 그 빛깔마저 푸르다. 푸른 꽃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흰 꽃잎이 보인다. 흰 꽃잎 하나는 나비를 유혹하기 위함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두리번거리며 나비를 찾아본다. 나비는 없고 시원한 바람만이 쉬지 않고 불어와 산수국을 흔든다.

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송악산 올레길의 끝자락에 이른다. 송악산 솔잎길이 기다리고 있다. 솔잎길을 한참 걸어 내려가자 그 끝에 일행들이 서 있다. 소나무 향을 오래 맡아서일까. 미소 속에서 솔잎내음이 풍겨났다.

우리는 가장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준 그 무엇을 잊지 못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말 못하는 사물이든. 때로는 말 못하는 사물이 주는 울림이 더 크고 깊을 때가 있다.

지금 견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이가 있거든, 송악산 올레길을 걸으라. 나무계단에 앉아 두 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불어와 위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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