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샘

by 오솔길

테라스에 있는 블루베리 나무 주위가 소란스럽다. 아침 햇살이 이파리를 툭툭 두드리는가 하면 열매에 앉아 쪼르르 미끄럼을 탄다. 새벽부터 뜰에 날개를 펼치던 새들도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분주하다.


이른 봄, 참새가 블루베리 화분 받침대에 부리를 묻고 있다. 저기에 물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다지 깨끗한 물이 아닌 게 맘에 걸려 이가 나간 도자기 그릇에 물을 담아 화분 옆에 두었다. 그 뒤부터 새들 사이에 소문이 퍼진 모양인가. 집 앞 소나무에 집을 짓기 시작하던 까치도 가끔 물속에 부리를 담근다. 참새도 올망졸망 새끼를 앞세우며 모여들고, 등이 푸르스름한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직박구리도 특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기웃거린다. 그 모습이 정답고 익숙하다. 오래전 나도 새들처럼 엎드려 물을 마신 적이 있었다.

나는 읍내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자그마치 십리 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읍내를 가기 위해서는 하지개재를 넘어야 한다. 평범한 지명과 달리 하지기재는 가파른 고개였다. 헐떡거리며 고개를 넘으면 두 개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차가 다니는 신작로였고, 오른쪽은 구불거리는 좁은 길이었다. 친구들과 나는 늘 좁은 길을 선택했다. 가다 보면 다랑논 사이에 작은 ‘참샘’이 있었다. 물맛이 시원하고 달짝지근했다. 물을 배불리 마시고 나면 발걸음이 가벼웠다. 봉황산을 막 넘어온 해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길섶 자운영 풀잎에 대롱거리는 이슬방울이 교복 바지를 흠뻑 적셔도 싫지 않았다.

참샘은 고향 사람들만 아는 네모난 작은 샘이다. 하교 시간에는 가방을 논둑에 팽개치고 샘으로 달려갔다. 남자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여자애들이 가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주었다. 친구들의 목으로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개를 숙인다. 부드러운 물결 위에 내 얼굴이 둥실 떠오른다. 얼굴 위로 구름이 지나가고 길쭉한 새가 구름을 타고 날아오른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볼이 볼록해지도록 물을 마신다.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등과 가슴이 시원해지고 어느새 배가 빵빵해졌다.

샘 밑바닥은 모래로 덮여 있었다. 모래가 들썩일 때마다 여러 군데에서 물이 퐁퐁 솟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정신이 몽롱해지도록 물빛을 바라보았다. 차례를 기다리던 식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애는 옆집에 사는 또래였다. 늘 내게 뭐든 먼저 양보했다. 우리들의 배는 샘물로 가득 차서 참외 배꼽 모양이 되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쿡쿡 웃기를 멈추지 않았다. 식이는 야산에서 나뭇가지를 꺾어와 모래가 들썩이는 샘 바닥을 콕콕 찔렀다. 아무리 괴롭혀도 모래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달짝지근한 샘물이 과연 어디서 오는지 상상했다.

십리 길의 통학이 힘들었다. 아침마다 코피를 쏟았다. 세숫대야에 코피가 떨어지면 으앙 울음부터 터트렸다. 내 책가방은 식이의 자전거 뒤에 실려 신작로를 달렸다. 아버지의 부탁이었는지 식이가 자청한 건지 알 수 없다. 얇은 종이로 된 작은 영어단어장을 넘기며 논둑길을 지나 참샘에서 물을 마셨다. 연분홍 자운영 꽃이 만발한 논둑을 지나갈 때면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읍내 초입에 있던 붕어 빵집 앞에 식이가 내려놓은 책가방이 나를 기다렸다. 코피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그때 난 식이의 고마움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식이가 떠오른다. 경찰 제복이 잘 어울리던 식이가 몇 년 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식이를 배웅하기 위해 가던 날은 유난히 추웠다. 고속버스 창문 너머로 식이가 내 책가방을 싣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고 달리고 있었다. 식이의 하늘색 여름 하복이 바람에 한껏 부풀어 나부꼈다. 그 후, 신문 기사에서 어느 경찰관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과로로 순직 처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경찰관이 식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고향의 모습도 달라졌다. 가팔랐던 하지기재는 완만해졌고 신작로에 아스팔트가 깔렸다. 다랑논이 있던 곳도 경지정리가 되었다. 이제 참샘에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 단맛이 나던 샘물도 물맛을 잃었다. 추억 속에 있던 사람도 떠나간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기억들이다. 모래를 들썩이며 보글보글 올라오던 물방울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샘물을 마실 때 등줄기까지 느껴지던 시원함, 자전거 뒷자리에 내 책가방을 싣고 내달리던 식이의 뒷모습…. 이미지들이 하나하나 내게 말을 걸어오는 날은 고향 쪽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오늘도 새들의 청량한 울음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깨운다. 하얀 도자기 그릇에 물을 담아 블루베리 나무 아래 놓는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에세이포레 문학회 회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