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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의 Dec 13. 2018

인문학이 가져야 할 참된 역할

인문학을 지칭하는 용어는 ‘Humanities’라는 용어와 ‘liberal arts’라는 단어가 있다. 한 전문용어에 두 개의 영단어가 있는 경우도 드물지만 이렇게 파생형마저 다른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Humanities와 liberal arts의 차이는 무엇인가? 네이버 어학사전에 인문학을 검색하니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Humanities였다. liberal arts라는 단어는 몇 번을 건너가야 ‘인문과정’이라는 단어로 비슷하게 등장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liberal art에 인문과정이라는 뜻 말고 교양과정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자. Humanities를 좀 더 찾아보니 ‘Humanity’라는 단어의 파생형으로 나온다. ‘-ies’ 라는 어미를 보니 Humanities는Humanity의 복수형인 셈이다. 풀이하면 인간적인, 인간성의 복수형이니 인간성을 나타내는 복수의 것, 인간에 대한 역사, 인간의 예술, 인간의 생각, 행동 등 굉장히 넓은 의미를 갖는다.

liberal arts는 어떨까? ‘자유로운’이라는 단어와 학문의 성격을 표현하는 ‘arts’가 만나 조합되었다. 자유로운 학문, 학문이야 원래 자유로운 것인데 굳이 ‘자유로운’이라는 의미를 덧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쓰인 시기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점은 중세유럽에 Universitas가 등장하던 시기다. 당시 귀족들은 개인교사를 불러오니 굳이 Universitas에 갈 이유가 없다.즉 이 곳은 대상인, 전문직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다. 여기서 성장한 사람들은 이후 왕정을 몰아내고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이끌어내는 자본가 계급이 된다. 이들이 세상의 주역이 된 데에는 Universitas가 뒷받침했던 것이다. ‘Uni’ 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만큼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교육한다. 그 중에서 liberal arts는 자유민, 상인계급의 기본소양을 채우기 위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처음 시작할 당시 liberal arts는 문법, 논리, 산수, 기하, 수사, 음악, 천문이다.

정리하면 Humanities는 인간성의 복수형으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역사, 사상, 문학, 예술,행동, 생각을 포괄하는 단어이고, Liberal arts는 학문의 의미보다는 커리큘럼에 가깝다.

지금까지 위의 두 단어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두 단어 중 어떤 단어에 의미를 두는지에 따라 인문학의 위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인문학은 ‘liberal arts’ 일까, 아니면‘Humanities’ 일까? <反기업인문학>에서는 한국의 부는 인문학 열풍은 ‘liberal arts’라고 말한다. 대학에서 인문대학이라고 영어로 적은 것을 보면 ‘the college of liberal arts’ 이다. 결국 대학 안에서, 이 사회에서 인문학은 학문 그 자체로서의 인문학이 아닌 교양을 쌓기 위한 과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college에 비해서 통폐합이 비교적 쉽다. 전문영역이 아닌 교양을 위한 영역이기 때문에 이름과 커리큘럼만 수정하면 시대에 맞춰서 바꾸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Humanities로서의 인문학은 liberal arts에게 밀리게 된다.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인문학의 죽음은 Humanities의 죽음인 것이고, 최근의 인문학 열풍은 liberal arts의 열풍인 것이다.

혹자는 인문학이 콘텐츠로서 기술과 융합하는 것이 인문학이 사는 길이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그 말에 옳은 것 같다. 최근에는 교양강연프로그램, 인문학 습득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니까. 그런 것이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으니까.하지만 lieral arts가 유행하는 최근 트렌드를 살펴보자. 화자는 청자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청자들은 감탄한다. 교양수준의 알기 쉬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굉장해 대견해 한다. 그래서 그 다음은? 청자들은 그 배움에서 나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주체적인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가? 사회가 인문학 열풍이 불고 촛불시위도 일어나서 대통령도 탄핵했지만 정작 사람들의 인식은 그리 크게 바뀐 것이 없다. 난민혐오, 성소수자 혐오, 여성혐오 등 각종 혐오에 몸살을 앓고 있고, 맹목적인 추종만 남아있다. liberal arts가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면 그것을 배우는데 어떻게 같은 인간을 혐오할 수 있을까.

또 유수의 기업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기업은 사람을 만든다는 광고를 하고, 인문학 진흥을 위해 많은 강사들을 불러 강연을 하고 해외여행을 시켜준다. 기업의 인사면접자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테스트하기 위해 관련 업체에 자문을 구한다.그렇게 인문학 진흥을 위해 노력하면서 왜 그들의 경영에는 인간성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불공정 계약, 횡령, 투기, 뇌물, 각종 갑질 등 수많은 범죄와 도덕적 해이를 저지르는가? 그리고 인문학을 배운 자본가들이 세계를 이끄는 데 왜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 것인가?

결국 liberal arts에서 인간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대상인, 전문직 계급(부르주아지)이 귀족을 닮기 위해,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꿀리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이들이 교육받는 것은 돈을 매개로 정치적, 의식적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 받는 교양학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현실을 마주보고 비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현 인문학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모든 부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그 동안 개인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같이 들었다. 이 사회에 만연한 인문학 열풍 속에서 인문학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상 속 변혁에 관한 싸움은 회피하는 모순을 보았다.그리고 굉장히 거대한 적, 기업이 아닌 나 자신,내 주변과 싸우고 있다는 것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존재했다. 반기업 인문학이라는 제목과 달리 끝으로 갈수록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기업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아진다.시작은 인문학이지만 끝은 기업 나빠요로 마무리되는 모양새다. 기업 인문학에 대한 비판과Humanities로서의 인문학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으면 좀 더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필자는 인생 전체에서 인문학만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이런 고민과 실험도 좋지만 인문학을 왜 공부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해야 먹고사는 문제도 조금씩 실마리를 얻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괴물이 되면 안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인문학을 가지고 세상과 싸우면서 세상의 논리에 먹히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담론을 생산하도록 항상 고민하고 정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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