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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성 Oct 30. 2023

빗방울이 만나는 세상

저 먼 하늘 위에는 구름과 빗방울이 마을을 꾸리고 지내는 세상이 있어요. 그곳에 사는 빗방울들은 저마다 구름 위에 터를 잡고 살았어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두루두루 사이가 좋았어요. 아주 가끔 목소리가 큰 천둥이 마을에 방문하지 않는 한, 빗방울과 구름이 함께 사는 세상은 늘 고요하고, 평화로웠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 마을의 주민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났어요.


“아니, 이른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이야?”

“그러니까. 게다가 오늘은 주말인데! 나도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어.”

“혹시 오늘 천둥이 우리 마을에 찾아온다고 했어?”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

“나도.”


잠에서 깬 구름들과 빗방울들은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아내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들었어요. 목소리를 낮추고 귀를 기울여 소리의 정체를 파헤치던 중, 한 구름이 입을 열었어요.


“잠깐, 이 목소리라면 이웃 구름과 함께 살고 있는 빗방울의 목소리 아니야?”

“맞아! 울고 있나 봐. 무슨 일이지?”


구름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재빨리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이동했어요. 이웃 구름과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들렸던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어요.


“나는 계속 이곳에서 지내고 싶어!”


구름들의 추측대로, 그 목소리는 작은 빗방울의 것이었어요. 작은 빗방울은 두 손으로 구름의 옷자락을 꼭 쥔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어요. 빗방울의 손은 자꾸만 미끄러졌어요. 그럴 때마다 빗방울은 저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요. 구름은 그런 빗방울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구름은 빗방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빗방울아, 저 아래에도 분명 좋은 곳이 있을 거야. 이제 그만 두 손을 놓으렴.”

“싫어, 싫어!”


구름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빗방울은 소리 내 엉엉 울었어요. 빗방울의 두 눈에서는 흐르는 눈물은 보슬비가 되어 저 아득한 발밑으로 떨어졌어요.


“구름아! 제발 부탁이야. 나를 밀어내지 말아 줘.”


그 간절한 목소리에 구름은 고개를 숙여 옷자락에 매달려 있는 빗방울을 보았어요. 구름의 마음은 아프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곤란하기도 했지요. 구름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빗방울과 눈을 맞췄어요. 빗방울의 동그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마를 줄 모르고 차올랐어요.  


“미안해 빗방울아. 하지만 나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이 세상 모든 구름과 빗방울이라면 한 번씩 겪어야 하는 이별이야. 우리도 마찬가지고. 이제는 네가 나를 떠나줘야 해.”

구름은 무거운 마음으로 몸을 돌렸어요.  

“어…! 어…! 어…!”


구름이 몸을 돌리며 옷매무새를 정리했어요. 그러자 손이 미끄러진 빗방울은 결국 구름의 옷자락을 놓치고 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빗방울은 생각했던 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 깊이 떨어졌어요. 내려가도 내려가도 낙하는 끝나지 않았어요. 빗방울의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어요. 빗방울은 다시 한번 울음 섞인 목소리로 구름을 외쳤어요.


“구름아!”


저 아래로 떨어지면서 울부짖는 빗방울의 소리를 들은 다른 구름들이 웅성거렸어요.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누구나 다 겪는 일일 뿐인데 저 빗방울은 왜 저렇게 유난일까?”

“그러게, 별것도 아닌 일로 이른 아침부터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다니.”


옆에서 여유롭게 낙하를 준비하던 또 다른 빗방울은 구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고는 뛰어내리기 전에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어요. 빗방울은 큰 소리로 말했어요.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해서, 그 일이 모두에게 쉬운 건 아닐 수도 있어요.”


 빗방울의 말을 들은 구름들은 그제야 조용해졌어요.  

자신의 우는 목소리가 저 먼 하늘까지 닿는지조차 모르던 빗방울은 쉼 없는 낙하의 충격과 두려움 속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어요. 빗방울은 자신이 눈을 감고 그 이후로 얼마나 더 깊이, 더 빠르게 떨어졌는지는 알지도 못할 만큼 정신을 잃었어요. 그렇게 정신을 잃었던 빗방울을 깨운 건 신비한 감촉이었어요.  


빗방울은 얼굴 위에 포개고 있던 두 손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어요. 빗방울은 자신의 체온보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품 안에 안겨 있었어요. 그 품은 빗방울과 완전하게 똑같은 부드러운 감촉을 지니고 있었어요.


“여기가 어디지?”


빗방울은 두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어요. 그 모습을 발견한 다른 빗방울 친구들은 조심스럽게 빗방울의 곁으로 모여들었어요.


“이제 좀 정신이 드니?”


구름이 함께하지 않는 세상에는 친구도, 기쁨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빗방울은 자신의 곁으로 모여든 빗방울 친구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빗방울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을 걱정해 준 친구에게 대답했어요.


“응. 내가 정신을 잃었었구나.”

“맞아. 한동안 깊게 잠을 잤어.”

“그렇구나, 그럼 너는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니?”

“여기는 웅덩이야. 먼 곳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앞으로는 우리와 함께 이 웅덩이에서 지내자.”

“웅덩이라니, 예쁜 이름이다. 나는 구름 아래로 떨어지면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어.”

“우리도 떨어지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이곳도 정말 좋아, 그렇지?”

“응.”


먼저 웅덩이에서 지낸 빗방울 친구들은, 빗방울과 산책하며 웅덩이의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었어요. 웅덩이는 근사한 곳이었어요.  


“어머, 새로 보는 빗방울 친구구나? 반가워.”


웅덩이 옆에 있던 노란 들꽃이 인사를 건넸어요. 빗방울은 노란 들꽃의 고운 목소리에 깜짝 놀랐어요.


“환영해 줘서 고마워.”


그 모습을 지켜본 빗방울 친구들은 흐뭇하게 웃었어요. 빗방울이 도착한 웅덩이에는 친절한 빗방울 친구들과 아름다운 들꽃 외에도 멋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무당벌레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풀잎처럼요.  


 빗방울은 구름의 옷자락을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어요. 빗방울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옆에는 이제 막 구름에서 이곳으로 낙하한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중에도 가장 밝은 표정을 한 빗방울이 웅덩이에 도착하자마자 소리쳤어요.


“땅이야! 드디어 땅에 왔어. 저 위에서 바라만 보던 땅에 무사히 도착했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던 빗방울은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해 기쁨의 탄성을 외치는 빗방울의 옆으로 다가갔어요. 자세히 보니, 그 빗방울은 자신이 살던 구름 바로 옆에 살고 있던 빗방울이었어요.  


“너, 내가 아는 그 이웃 빗방울 맞지?”


빗방울은 반가운 마음으로 말을 걸었어요. 그러자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정돈하던 빗방울이 고개를 돌렸어요.


“어머! 너 무사히 웅덩이에 도착했구나? 다행이야. 아까는 많이 울던데, 지금은 괜찮니?”

“응. 이제는 괜찮아. 아까는 아무것도 몰라서 무서웠거든.”

“그래 보였어. 이해해.”

“너는 구름 아래에 이렇게 멋진 세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럼. 나는 항상 이곳에 올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렸어. 이 달콤한 흙냄새를 느껴봐.”


신난 빗방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자신에게 말을 건 빗방울에게 흙의 향기를 느껴보라고 손짓했어요. 엉거주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빗방울은 친구를 따라 숨을 크게 들이 마셨어요. 상쾌한 공기 안에는 구름의 향도 조금 섞여 있는 거 같았고, 축축하고 고소한 향이 기분 좋게 섞여 있었어요.


“정말 좋은 향이다.”

“이곳에는 흙의 향기 말고도 재밌고, 멋진 것들이 많아. 앞으로 같이 잘 지내보자.”

“좋아. 근데, 너는 어떻게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난 항상 이곳에 오게 될 날을 상상하며 기다렸거든. 관심이 많은 만큼 자연스럽게 이곳과 관련된 많은 것들을 알게 됐어.”

“그렇구나.”

“아까는 네가 너무 슬퍼하길래 내가 큰 소리로 ‘나도 곧 따라갈 거야. 아래에서 만나.’라고 소리쳤는데, 못 들었지?”

“응. 그때는 구름의 목소리밖에 안 들렸어.”

물방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빙긋 웃었어요. 아직도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고, 궁금한 게 많은 물방울이 다시 입을 열었어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는 웅덩이라는 곳에 모여서 계속 함께 살 수 있는 거야?”

“당분간은.”

“그 이후에는?”

“사실,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없어.”


이곳에 대해서는 뭐든지 알고 있을 거 같았던 빗방울 친구가 확신 없는 대답을 하자, 빗방울의 얼굴에는 걱정이 드리워졌어요. 그런 친구의 얼굴을 본 빗방울이 이어 말했어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든지, 분명 좋을 거야. 네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구름의 곁을 떠나서도 이렇게 멋진 곳에 도착했듯이 말이야. 그리고 구름 아래의 이 세상에서도 너를 아끼는 친구를 만나고, 즐거운 일들을 잔뜩 경험할 수 있는 거처럼! 너는 다른 곳에 가더라도 항상 그렇듯 널 아끼는 친구를 만나고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친구의 따뜻한 응원 덕분에 걱정이 가득했던 빗방울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어요. 또 어떤 새로운 세상이 빗방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빗방울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요? 햇살이 손길을 내밀면 그 손에 올라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할까요? 혹은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누군가의 신발 위에 올라타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게 될까요? 아마 모두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더 멋진 일들이 생길 수도 있겠죠.

어떤 일들이 빗방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빗방울들은 더 이상 새롭게 마주할 세상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 않아요. 빗방울들은 지금 지내고 있는 웅덩이에서 통통 뛰어다니며 춤을 추고, 현재를 즐기기로 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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