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
어떤 회사가 가장 이상적일까?
아마도 2012~2013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세 번째 회사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마냥 좋게 보이던 회사도 점점 경력이 쌓이고 이것저것 알게 되면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내가 다니던 회사는 어떤 곳이었는지 자세히 곱씹어볼 수 있게 된다. 난 회사의 주인이 아니기에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얻을 수 있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고, 그렇게 봤을 때 세 번째 회사는 상당히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비록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변해가서 그 시절 같은 모습은 다시는 오지 않기는 했지만 그런 경험을 한 건 내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첫 번째 회사는 철저하게 성과 중심적이었다. 회사 분위기도 자유롭고, 사람들 사이에 거리낌이나 그런 것도 없고 그랬지만 호칭에는 여전히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 등이 남아있었고 성과를 위해서라면 팀 간에 다투는 일도 많았다. 흔히들 사내 정치라고 하는 행위들이 어린 내 눈에도 보일 정도로 치열했다. 대신 거기를 다니면서 얻을 수 있는 건 확실했다. 회사의 성과가 워낙 좋았기에 보상도 좋았고, 그곳에서의 경험을 다른 회사에서도 좋은 경력으로 잘 인정해주곤 했다. 회사원으로 다니기에는 가장 좋은 회사였던 것 같다.
두 번째 회사는 화기애애했다. 첫 번째 회사에 비해 성과에 대한 집착이나 경쟁 등은 확실히 덜했고, 대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굉장히 좋았다. 서로 배려했고, 가능한 충들을 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그런 만큼 반대급부로 흐지부지 되는 것도 많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회사의 생존은 문제없었기에 나쁜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모든 회사가 다 반드시 1등을 노리면서 전력질주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편한 마음으로 다니기에는 참 좋았지만 욕심을 부리기에는 다소 아쉬운 회사였다.
그리고 세 번째 회사는 과정이 가장 좋았던 회사였다. 과정이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던 기간도 꽤 길었다. 새로 출시한 서비스들의 성과가 나지 않으면서 회사 분위기가 조금씩 부정적으로 변해가기도 했다. 원래 문제는 어려움이 닥칠 때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나는 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과정은 참여하는 사람들 개개인을 존중해야 비로소 좋아질 수 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그것이 2013년 즈음에는 가능했고, 그렇기에 나 같은 일개 직원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회사였다.
다음은 신선했고 좋았던 몇몇 사례들이다.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결정이 토론을 통해 일어났고, 그 토론에 원하면 참여하고 의견까지 할 수 있었다. 토론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모든 업무를 '아지트'라는 업무 툴을 활용해 완전히 공개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조직은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볼 수 있었고, 의견을 내는 것이 자유로웠고, 이런 문화는 오프라인 회의에서도 토론이 활발하게 이어지는 것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 번은 캐릭터(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프렌즈) 도입을 두고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 이걸 도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기본 탑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당연히 할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작가들과의 형평성, 이모티콘 생태계, 퀄리티에 대한 논의 등 수많은 의견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오갔다. 실로 충격적이었다. 이런 걸 논의를 한다고? 이미 다른 업체에서는 활발하게 하고 있던 것이고, 해서 나쁠 건 전혀 없어 보였는데. 당시에는 그런 것까지 치열하게 토론을 하고 모두가 납득하는 과정을 거쳐서 일이 진행이 됐다.
물론 이런 과정은 진행을 느리게 한다. 하지만 조금 느린 대신에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며 합의하고 나아갈 수 있기에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각 구성원을 '크루'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모두가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의미였고, 실제로 각자 서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같은 회사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이 상당히 강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이미 200명 후반이었으니 결코 작은 회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300명대가 된 후에도 그런 문화는 여전히 유지가 됐다. 회사의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드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온라인에 사내 마켓이 생겼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활발하게 물건을 올리고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물건들이 오갔고, 가격 역시 외부에서 볼 수 없는 이른바 '쿨매'들이 넘쳐났다. 친한 지인에게 거래하는 것처럼 좋은 거래들이 많았고 무료 나눔 역시 많았다. 최근에 <당근 마켓> 창업 관련 이야기(창업자 역시 이곳 출신)를 본 것 중에 회사의 이런 사내 마켓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 역시 그것을 읽고 충분히 수긍할 만큼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활발하고 훈훈한 중고장터였다.
언젠가는 회사의 인센티브 관련해서 토론이 활발하게 이어졌는데 사람들의 주된 요구는 '엔빵'이었다. 인센티브를 차등으로 주지 말고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성과를 낸 것인 만큼 똑같은 금액으로 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주장이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다. 결과적으론 최종 의사결정이 엔빵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서로를 존중하고 같은 배를 탄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내가 2013년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회사 라운지에 떡을 따로 잔뜩 주문해서 아무나 가져가서 드시라고 할 정도로. 그땐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2013년 5월, 전 직원이 하와이로 워크샵을 갔다. 아래 사진은 와이키키의 공항에 걸려 있던 걸개인데 "진짜로 올 줄 몰랐지?"라는 말처럼 전 직원이 하와이로 워크샵을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시작은 작은 약속이었다. 누적 회원수 1억 명을 달성하면 모두가 함께 하와이로 간다는 것이었다. 누적 회원수 1억 명도 상상하지 못했던 숫자였고 하와이는 더더욱 그랬다. 그 멀고 비싼 곳을 전 직원이 어떻게 함께 가겠는가. 그런데 1억 명을 진짜로 달성했고, 하와이도 정말로 갔다. 아, 정말 충격이었다.
하와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회사에서 한 약속을 결국 지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와이는 그저 그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일 거다. 회사에서 먼저 이렇게 신뢰를 지켜 준다면 직원들 역시 자연스레 회사에 신뢰를 지키게 된다. 모든 정보를 아지트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대신 해당 정보는 각자가 스스로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다는 약속, 당시 회사가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내세웠던 "신뢰, 충돌, 헌신". 이런 것들 모두 결국 서로가 약속을 잘 지켰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